2013년 갤러리현대에서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개인전에서(사진=갤러리현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상징하는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리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창열 화백이 지난 5일 향년 92세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故)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부친 김대권과 모친 안영금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고, 훗날 ‘휘귀’ 연작을 통해 그러한 기억을 작품에 녹여 냈다. 1946년 서울로 내려와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근 일 년 동안 서울의 월남민 피난 수용소에서 지낸다. 이듬해, 사설 미술학원인 경성미술연구소에 등록하고, 이어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한다. 1952년 경창전문학교의 속성 과정을 마친 그는 제주도로 파견되어 근무하는데, 이 인연을 계기로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개관식에서(사진=갤러리현대) 휴전 후 서양화가 이상복의 화실에서 조수로 일하던 그는 또래의 작가들을 만나 어울렸고,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하인두와 함께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창립해 동인전을 개최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한다. 기존의 화단 질서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협’을 통해 당대 전위 미술의 주요 경향인 앵포르멜의 흐름을 주도했다. 김창열은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1963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다. 1965년부터 4년간 미국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Arts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첨단의 미술 환경에 적응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간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주류 화단 흐름에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반복되며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변화를 모색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는 파리로 돌아가 생활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2013년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이를 계기로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특히 ‘물방울 그림’은 1972년 파리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이래 동양적 정신을 담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말년까지 50년 가까이 창작을 거듭해온 ‘등록상표’와 같은 작품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쥬드폼므미술관, 중국국가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프랑스 퐁피두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턴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 'The Path(더 패스)' 전경(사진=갤러리현대)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물방울과 함께 문자의 도입과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The Path(더 패스)’전이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마르틴 질롱 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으며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11시50분 예정이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 숙환으로 별세...향년 92세

이동현 기자 승인 2021.01.06 15:31 의견 0
2013년 갤러리현대에서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개인전에서(사진=갤러리현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상징하는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리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창열 화백이 지난 5일 향년 92세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故)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부친 김대권과 모친 안영금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고, 훗날 ‘휘귀’ 연작을 통해 그러한 기억을 작품에 녹여 냈다.

1946년 서울로 내려와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근 일 년 동안 서울의 월남민 피난 수용소에서 지낸다. 이듬해, 사설 미술학원인 경성미술연구소에 등록하고, 이어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한다. 1952년 경창전문학교의 속성 과정을 마친 그는 제주도로 파견되어 근무하는데, 이 인연을 계기로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개관식에서(사진=갤러리현대)


휴전 후 서양화가 이상복의 화실에서 조수로 일하던 그는 또래의 작가들을 만나 어울렸고,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하인두와 함께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창립해 동인전을 개최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한다.

기존의 화단 질서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협’을 통해 당대 전위 미술의 주요 경향인 앵포르멜의 흐름을 주도했다.

김창열은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1963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다.

1965년부터 4년간 미국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Arts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첨단의 미술 환경에 적응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간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주류 화단 흐름에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반복되며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변화를 모색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는 파리로 돌아가 생활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2013년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이를 계기로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한다.

특히 ‘물방울 그림’은 1972년 파리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이래 동양적 정신을 담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말년까지 50년 가까이 창작을 거듭해온 ‘등록상표’와 같은 작품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쥬드폼므미술관, 중국국가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프랑스 퐁피두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턴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 'The Path(더 패스)' 전경(사진=갤러리현대)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물방울과 함께 문자의 도입과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The Path(더 패스)’전이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마르틴 질롱 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으며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11시50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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