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누구라 한들 운명이라는 실체 없는 결정타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뜻하지 않게 넘어지는 순간, 툭툭 털고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면 '혹시 이것이 나의 운명일까?'를 읊조려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과 사랑, 삶의 매순간을 열정으로 채워나간 사람일수록 시련에 대한 극복의지 또한 강하련만, 어디 삶이 그처럼 녹록한가. 일어서기 힘들었던 어떤 순간 서점의 환한 진열코너가 아닌, 책장 구석에서 꺼내 집어든 책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는 1990년대 '즐거운 사라'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광수 교수의 철학에세이다. 내방 책장에 일년을 묵혀둔 덕이었을까, 그 풍미가 더욱 깊어졌으리라는 착각 속에 읽어나간 책 속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꽉 막혀 있는 한국의 의식구조에  몸서리쳤고, 행복하게 사는 것과 남들처럼 사는 것을 두고 갈등했으며, 부모와 나, 나와 (있을지도 모를) 배우자, 우리와 (있을지도 모를) 자식의 관계를 한 번씩 생각할 때마다 막연한 절망감을 먼저 맛봐야 했던 서른 다섯 살의 나에게는 적어도 큰 다독임과 위로, 공감을 준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를 읽은 후 마광수의 문학 세계에 관심이 생겨 짚어든 '돌아온 사라'는 지식인의 변태적인 성행위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지만 적어도 이 책 '비켜아 운명아, 내가간다!'는 값졌다. 또한 현학적인 문장과 어려운 자료를 들먹일 때, '즐거운 사라'에 대한 변명이 불쑥불쑥 끼어들 때는 파괴를 일삼았다한들 마광수 역시 지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대학교수라는 게 상기되어 이물감이 생길지도.        ■ 나는 요즘 우리나라 전체에 팽배해 있는 국수적 민족주의 사상이 적이 걱정되는데, 한국 역사의 전통 또는 표준을 조선조 시대에다 놓고 조선조의 상징이 곧 한국의 상징으로 착각하는 식의 사고구조가 자칫하면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차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도교가 특히 성적 쾌락에 당당하고 적극적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열자나 양주같은 쾌락주의적 도가 철학자들이 유교의 도덕적 절제론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교가 효 사상과 가족윤리에 치중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해나가려 하는 데 대한 반발로, 그들의 모친이나 부인이 사망했을 때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던 것이다. 가족이기주의적 윤리가 자칫히면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깨달았던 셈이다. ■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부모의 학벌이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자식에게 아무것도 훈계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개천에서 미꾸라지가 자유롭게 헤엄쳐다니고, 소독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자식을 키울 때는 야하고 지극히 무식하게 키워야 한다. (사진=픽사베이) 효도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은 도리어 부모를 죽일 수도 있고, 부모의 후광에 대한 비굴한 기대감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게 된다. 우리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부모의 일차적 목적은 자식 생산이 아니라 섹스의 쾌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 ■ 출세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위한 교육이야말로 한 인간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구시대적인 가부장적 유교윤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아울러 전체주의적 사회기강에 알맞게 길들여진 인간상보다는 다원주의 사회에 알맞은 개성적 인간상을 궁극적 교육목표로 둘 수 있을 때, 가족관계의 갈등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불행들이 한결 예방될 수 있다. ■ 역설적 의도를 구체적 행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단절시키는 것과 아울러 과거에 대한 회한(또는 미련)을 단절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역경에 처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치면서 '아 그때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라고 자책하며 '그때 내가 만약에...'를 되풀이하게 되는 회한의 시기가 있다. 세원이 지나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못한 경우 이런 식의 과거집착은 곧 울화병이 되어버린다. ■ 주역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현재를 중요시하라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역경에 빠져있을 때는 역설적 의도에 의한 이열치열 방법이 크게 효과를 본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느낌과 본성, 그리고 욕구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그저 땜질해나가듯 무심히 살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문장공감] “우리는 부모를 고마워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 마광수

박진희 기자 승인 2020.03.06 11:11 의견 0
(사진=픽사베이)


누구라 한들 운명이라는 실체 없는 결정타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뜻하지 않게 넘어지는 순간, 툭툭 털고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면 '혹시 이것이 나의 운명일까?'를 읊조려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과 사랑, 삶의 매순간을 열정으로 채워나간 사람일수록 시련에 대한 극복의지 또한 강하련만, 어디 삶이 그처럼 녹록한가. 일어서기 힘들었던 어떤 순간 서점의 환한 진열코너가 아닌, 책장 구석에서 꺼내 집어든 책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는 1990년대 '즐거운 사라'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광수 교수의 철학에세이다. 내방 책장에 일년을 묵혀둔 덕이었을까, 그 풍미가 더욱 깊어졌으리라는 착각 속에 읽어나간 책 속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꽉 막혀 있는 한국의 의식구조에  몸서리쳤고, 행복하게 사는 것과 남들처럼 사는 것을 두고 갈등했으며, 부모와 나, 나와 (있을지도 모를) 배우자, 우리와 (있을지도 모를) 자식의 관계를 한 번씩 생각할 때마다 막연한 절망감을 먼저 맛봐야 했던 서른 다섯 살의 나에게는 적어도 큰 다독임과 위로, 공감을 준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간다!'를 읽은 후 마광수의 문학 세계에 관심이 생겨 짚어든 '돌아온 사라'는 지식인의 변태적인 성행위에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지만 적어도 이 책 '비켜아 운명아, 내가간다!'는 값졌다.

또한 현학적인 문장과 어려운 자료를 들먹일 때, '즐거운 사라'에 대한 변명이 불쑥불쑥 끼어들 때는 파괴를 일삼았다한들 마광수 역시 지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대학교수라는 게 상기되어 이물감이 생길지도.   

 

 


■ 나는 요즘 우리나라 전체에 팽배해 있는 국수적 민족주의 사상이 적이 걱정되는데, 한국 역사의 전통 또는 표준을 조선조 시대에다 놓고 조선조의 상징이 곧 한국의 상징으로 착각하는 식의 사고구조가 자칫하면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차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도교가 특히 성적 쾌락에 당당하고 적극적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열자나 양주같은 쾌락주의적 도가 철학자들이 유교의 도덕적 절제론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교가 효 사상과 가족윤리에 치중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해나가려 하는 데 대한 반발로, 그들의 모친이나 부인이 사망했을 때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던 것이다. 가족이기주의적 윤리가 자칫히면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깨달았던 셈이다.

■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부모의 학벌이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자식에게 아무것도 훈계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개천에서 미꾸라지가 자유롭게 헤엄쳐다니고, 소독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자식을 키울 때는 야하고 지극히 무식하게 키워야 한다.

(사진=픽사베이)


효도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은 도리어 부모를 죽일 수도 있고, 부모의 후광에 대한 비굴한 기대감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게 된다. 우리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부모의 일차적 목적은 자식 생산이 아니라 섹스의 쾌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

■ 출세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위한 교육이야말로 한 인간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구시대적인 가부장적 유교윤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아울러 전체주의적 사회기강에 알맞게 길들여진 인간상보다는 다원주의 사회에 알맞은 개성적 인간상을 궁극적 교육목표로 둘 수 있을 때, 가족관계의 갈등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불행들이 한결 예방될 수 있다.

■ 역설적 의도를 구체적 행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단절시키는 것과 아울러 과거에 대한 회한(또는 미련)을 단절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역경에 처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치면서 '아 그때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라고 자책하며 '그때 내가 만약에...'를 되풀이하게 되는 회한의 시기가 있다. 세원이 지나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못한 경우 이런 식의 과거집착은 곧 울화병이 되어버린다.

■ 주역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현재를 중요시하라는 것이다. 물론 특별한 역경에 빠져있을 때는 역설적 의도에 의한 이열치열 방법이 크게 효과를 본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느낌과 본성, 그리고 욕구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그저 땜질해나가듯 무심히 살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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