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낯선 지방 발령에 기대 둘, 걱정 여덟의 심정으로 난생처음 강원도 원주에 발을 디뎠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이군요. 오늘은 그때 겪었던 믿기지 않는 경험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원주에서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집이었습니다. 이사할 전셋집이 필요한데, 가격은 따지지 않겠다는데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격 불문이 된 건 회사의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회사가 지원하는 집은 전세만 가능했는데, 그 대신 국민주택 규모면 가격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집을 못 구해 주말부부 생활이 길어지자, 회사의 지원을 포기하고, 내 돈으로 집을 사는 걸 고려해야 했습니다. 매매를 알아보려고 부동산을 찾았습니다. 새 아파트 위주로 시세를 알아봤는데, 대화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세가 하나같이 분양가를 밑돕니다. 의아해하는 저에게 부동산 사장이 한마디 합니다. “시세가 분양가보다 낮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중고가 되면 가격은 내려가지요. 새 차를 한 달만 타도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감가상각도 생각해야지요.” 사장님 설명이 이어집니다. 아파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게 세상 이치이니, 살고 있는 집 외에 아파트를 갖고 있는 건 어리석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금 싸게 팔지언정 전세를 놓지는 않는다는군요. 원주에서 전세를 구하기 힘든 이유랍니다. 사장님 얘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분양가보다 싼 아파트가 당연하다고? 아파트 가격이 ‘감가상각’ 때문에 떨어진다고? 생각도 못 해본 얘기였고, 무엇보다 반박할 논리가 없었습니다. 제 표정이 좀 묘했던지, 사장님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더군요. “알만한 분이...” 서울과 원주는 아파트에 관한 한 분명 딴 세상이었습니다.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분명 어느 한쪽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지요. 어쨌든 원주에서의 이 색다른 경험은 ‘집값의 이치’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얼마 전 정부가 전세제도 폐지를 검토한다는 기사에, 전세를 보기 힘들었던 20년 전 원주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원주의 상황이 일반적인 것은 아닌데, 전세를 없애도 될까요? 아니, 그게 가능할까요? 생각이 복잡했는데, 곧 ‘보완’으로 입장을 정리하더군요. 그나저나 정부는 왜 전세제도에 손을 대려는 걸까요?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전세제도가 도마 위에 오른 건 전세 사기, 깡통전세, 역전세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올가을, 내년 봄이 되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예상입니다. 내년 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전세 사태가 확산하면 정부의 입장이 난처합니다. 정부는 전 정권의 책임을 주장하고 싶겠지요.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내년 봄이면 집권 3년 차인 정부가 남 탓하는 걸 유권자들이 이해해 줄까요? ‘너희는 뭘 했느냐?’고 묻지 않을까요?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입니다. 정부는 문제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사달의 원인이 된 전세제도를 아예 없애버리는 게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상책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세 폐지가 간단한 일이 아닌 데다, 여론도 부정적입니다. 정부가 ‘보완’으로 입장을 바꾼 이유겠지요. 보완책으로 임대인의 보증금 활용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한답니다. 보수정권이 사유재산에 대한 제약까지 고려하겠다는 걸 보면, 상황이 꽤 급한 것 같습니다. 인위적으로 단시간 내에 없애기는 어렵겠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전세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가 집 투기의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투기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1주택자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달랑 집 한 채에 무슨 투기냐고 따지겠지만, 현상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서울의 1주택자가 지방으로 이사를 하면 당연히 집을 세놓습니다. 거주할 여건도 안 되는 집을 ‘전세 끼고’ 삽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미명하에 ‘영끌’은 주택 수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세차익 때문입니다.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려는 게 ‘투기’입니다. 투자는 많은 경우 돈이 아닌 ‘가치’를 목적으로 하고, 돈이 목적인 경우에도 방법이 ‘시세차익’은 아닙니다. 사업에 ‘투자’해서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반사회적 행동이었던 투기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되는 데에는 이처럼 전세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일상화된 투기의 영향을 통계로 추정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자가 보유율은 60.6%이지만, 자기 집에 살고 있는 가구는 57.3%에 그칩니다. 3.3%, 약 73만 가구가 자기 집을 두고 남의 집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3기 신도시로 공급되는 총가구 수가 20만 남짓인 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이지요.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투기’일 공산이 큽니다. 이 엄청난 투기 수요가 ‘부동산 불패’의 한 축이었습니다. 투기로 인한 집값 상승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기가 투기를 불러 대한민국을 투기에 관대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갭 투기’를 ‘갭 투자’라고 합니다. 투기꾼은 청문회에서만 비난의 대상일 뿐, 일상에서는 롤모델입니다. 심각한 것은 집값 상승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각하지만 해결책은 쉽습니다. 원주에서 배웠듯 살지 않는 집을 갖고 있지 않으면 됩니다. 돈도 좋지만,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해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에 대해 자본주의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 이상주의자의 철없는 주장이라며 폄하하는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집 투기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고, 집으로 돈 버는 게 불가능하도록 제도를 손봐야 합니다. 금리 이상의 시세차익 전부를 회수하는 조세정책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발이 있겠지만, 취득세와 재산세를 폐지한다면 건전한(?) 1주택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공주택을 과감히 늘려야 합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정책을 넘어 중산층의 주거 형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질적인 변화도 필요합니다. 투기가 아닌 ‘거주할 집’을 구하기 위해 ‘영끌’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잘못된 사회입니다. 우리나라의 공공주택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해야 할 일을 쌓아 놓고 정부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깡통전세, 역전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대인에게 돈을 빌려주겠답니다. 역전세는 집을 팔아서 해결할 문제이고, 깡통전세는 일단 집의 소유권을 임차인에게 넘기는 게 먼저입니다. 정부의 조치는 투기에 대한 지원입니다. 정부가 빌려주겠다는 돈은 누구의 돈인가요? 투기에 눈길 주지 않고, 저축을 선택한 우리 이웃의 귀한 돈입니다. 그 돈으로 투기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고요? 그 덕에 투기에 성공한 사람은 저축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웃겠지요? 정부가 이러면 안 됩니다. 일상화된 투기의 문제를 지적하고, 모두가 자중하자는 의미였는데,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번졌습니다. 정부의 잘못이 큰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그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원주 아파트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전세를 포기하고 집을 사는 걸로 마음을 굳혀갈 때쯤, 드디어 전세가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공기업 원주지사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는데, 새집에 입주한 지 채 1년도 못 돼 타지역으로 발령이 났답니다. 수년을 기다렸던 새집이고, 2~3년 후면 다시 원주로 돌아올 거라서 전세를 놓는답니다. 집을 깨끗이 써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힘들게 구한 집이었지만, 우리 가족도 1년 남짓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시 발령이 났으니까요. 짧았던 우리 가족의 원주 생활은 평생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기억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사 가던 날, 일찍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던 우리 가족을 위해 앞집 아주머니가 아침상을 차려준 겁니다. 아파트 값이 분양가보다 낮은 것이 당연하고, 전세를 구하기 위해 네댓 달을 기다려야 하는 곳, 이사 가는 이웃을 위해 새벽같이 아침을 준비해 주는 이웃이 있는 곳이 제가 20년 전에 경험한 원주입니다. 2023년의 원주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많이 변했을까요? ■ 작가 한동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 23기로 군복무를 마친 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중앙개발과 삼성증권에서 인사, 법인영업을 거쳐 지점장으로 10년간 근무했다. 30여년 삼성맨을 마무리한 그는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네이버 블로그 '까칠한 이야기'를 통해 돈, 금융 그리고 세상에 대한 '썰'을 재밌게 풀어내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글은 뷰어스에서 우선적으로 게재하며, 추후 작가의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다.

[한동희의 까칠한이야기] 원주아파트 이야기

한동희 승인 2023.08.18 08:00 의견 1


2002년 2월, 낯선 지방 발령에 기대 둘, 걱정 여덟의 심정으로 난생처음 강원도 원주에 발을 디뎠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이군요. 오늘은 그때 겪었던 믿기지 않는 경험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원주에서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집이었습니다. 이사할 전셋집이 필요한데, 가격은 따지지 않겠다는데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격 불문이 된 건 회사의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회사가 지원하는 집은 전세만 가능했는데, 그 대신 국민주택 규모면 가격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집을 못 구해 주말부부 생활이 길어지자, 회사의 지원을 포기하고, 내 돈으로 집을 사는 걸 고려해야 했습니다. 매매를 알아보려고 부동산을 찾았습니다. 새 아파트 위주로 시세를 알아봤는데, 대화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세가 하나같이 분양가를 밑돕니다. 의아해하는 저에게 부동산 사장이 한마디 합니다. “시세가 분양가보다 낮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중고가 되면 가격은 내려가지요. 새 차를 한 달만 타도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감가상각도 생각해야지요.”

사장님 설명이 이어집니다. 아파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게 세상 이치이니, 살고 있는 집 외에 아파트를 갖고 있는 건 어리석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금 싸게 팔지언정 전세를 놓지는 않는다는군요. 원주에서 전세를 구하기 힘든 이유랍니다.

사장님 얘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분양가보다 싼 아파트가 당연하다고? 아파트 가격이 ‘감가상각’ 때문에 떨어진다고? 생각도 못 해본 얘기였고, 무엇보다 반박할 논리가 없었습니다. 제 표정이 좀 묘했던지, 사장님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더군요. “알만한 분이...”

서울과 원주는 아파트에 관한 한 분명 딴 세상이었습니다.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분명 어느 한쪽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지요. 어쨌든 원주에서의 이 색다른 경험은 ‘집값의 이치’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얼마 전 정부가 전세제도 폐지를 검토한다는 기사에, 전세를 보기 힘들었던 20년 전 원주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원주의 상황이 일반적인 것은 아닌데, 전세를 없애도 될까요? 아니, 그게 가능할까요? 생각이 복잡했는데, 곧 ‘보완’으로 입장을 정리하더군요.

그나저나 정부는 왜 전세제도에 손을 대려는 걸까요?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전세제도가 도마 위에 오른 건 전세 사기, 깡통전세, 역전세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올가을, 내년 봄이 되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예상입니다.

내년 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전세 사태가 확산하면 정부의 입장이 난처합니다. 정부는 전 정권의 책임을 주장하고 싶겠지요.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내년 봄이면 집권 3년 차인 정부가 남 탓하는 걸 유권자들이 이해해 줄까요? ‘너희는 뭘 했느냐?’고 묻지 않을까요?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입니다. 정부는 문제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사달의 원인이 된 전세제도를 아예 없애버리는 게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상책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세 폐지가 간단한 일이 아닌 데다, 여론도 부정적입니다. 정부가 ‘보완’으로 입장을 바꾼 이유겠지요. 보완책으로 임대인의 보증금 활용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한답니다. 보수정권이 사유재산에 대한 제약까지 고려하겠다는 걸 보면, 상황이 꽤 급한 것 같습니다.

인위적으로 단시간 내에 없애기는 어렵겠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전세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가 집 투기의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투기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1주택자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달랑 집 한 채에 무슨 투기냐고 따지겠지만, 현상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서울의 1주택자가 지방으로 이사를 하면 당연히 집을 세놓습니다. 거주할 여건도 안 되는 집을 ‘전세 끼고’ 삽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미명하에 ‘영끌’은 주택 수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세차익 때문입니다.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려는 게 ‘투기’입니다. 투자는 많은 경우 돈이 아닌 ‘가치’를 목적으로 하고, 돈이 목적인 경우에도 방법이 ‘시세차익’은 아닙니다. 사업에 ‘투자’해서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반사회적 행동이었던 투기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되는 데에는 이처럼 전세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일상화된 투기의 영향을 통계로 추정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자가 보유율은 60.6%이지만, 자기 집에 살고 있는 가구는 57.3%에 그칩니다.

3.3%, 약 73만 가구가 자기 집을 두고 남의 집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3기 신도시로 공급되는 총가구 수가 20만 남짓인 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이지요.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투기’일 공산이 큽니다. 이 엄청난 투기 수요가 ‘부동산 불패’의 한 축이었습니다.

투기로 인한 집값 상승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기가 투기를 불러 대한민국을 투기에 관대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갭 투기’를 ‘갭 투자’라고 합니다. 투기꾼은 청문회에서만 비난의 대상일 뿐, 일상에서는 롤모델입니다. 심각한 것은 집값 상승이 ‘없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각하지만 해결책은 쉽습니다. 원주에서 배웠듯 살지 않는 집을 갖고 있지 않으면 됩니다. 돈도 좋지만, ‘같이 사는 세상’을 위해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에 대해 자본주의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 이상주의자의 철없는 주장이라며 폄하하는 사람들이 걱정입니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집 투기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고, 집으로 돈 버는 게 불가능하도록 제도를 손봐야 합니다. 금리 이상의 시세차익 전부를 회수하는 조세정책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발이 있겠지만, 취득세와 재산세를 폐지한다면 건전한(?) 1주택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공공주택을 과감히 늘려야 합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정책을 넘어 중산층의 주거 형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질적인 변화도 필요합니다. 투기가 아닌 ‘거주할 집’을 구하기 위해 ‘영끌’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잘못된 사회입니다. 우리나라의 공공주택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해야 할 일을 쌓아 놓고 정부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깡통전세, 역전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대인에게 돈을 빌려주겠답니다. 역전세는 집을 팔아서 해결할 문제이고, 깡통전세는 일단 집의 소유권을 임차인에게 넘기는 게 먼저입니다. 정부의 조치는 투기에 대한 지원입니다.

정부가 빌려주겠다는 돈은 누구의 돈인가요? 투기에 눈길 주지 않고, 저축을 선택한 우리 이웃의 귀한 돈입니다. 그 돈으로 투기하는 사람들을 도와준다고요? 그 덕에 투기에 성공한 사람은 저축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웃겠지요? 정부가 이러면 안 됩니다.

일상화된 투기의 문제를 지적하고, 모두가 자중하자는 의미였는데,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번졌습니다. 정부의 잘못이 큰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그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원주 아파트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전세를 포기하고 집을 사는 걸로 마음을 굳혀갈 때쯤, 드디어 전세가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공기업 원주지사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는데, 새집에 입주한 지 채 1년도 못 돼 타지역으로 발령이 났답니다. 수년을 기다렸던 새집이고, 2~3년 후면 다시 원주로 돌아올 거라서 전세를 놓는답니다. 집을 깨끗이 써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힘들게 구한 집이었지만, 우리 가족도 1년 남짓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제가 다시 발령이 났으니까요. 짧았던 우리 가족의 원주 생활은 평생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기억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사 가던 날, 일찍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던 우리 가족을 위해 앞집 아주머니가 아침상을 차려준 겁니다.

아파트 값이 분양가보다 낮은 것이 당연하고, 전세를 구하기 위해 네댓 달을 기다려야 하는 곳, 이사 가는 이웃을 위해 새벽같이 아침을 준비해 주는 이웃이 있는 곳이 제가 20년 전에 경험한 원주입니다. 2023년의 원주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많이 변했을까요?

■ 작가 한동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 23기로 군복무를 마친 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중앙개발과 삼성증권에서 인사, 법인영업을 거쳐 지점장으로 10년간 근무했다. 30여년 삼성맨을 마무리한 그는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네이버 블로그 '까칠한 이야기'를 통해 돈, 금융 그리고 세상에 대한 '썰'을 재밌게 풀어내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글은 뷰어스에서 우선적으로 게재하며, 추후 작가의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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