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 노래를 아시지요? 혹시 노랫말이 엉터리라는 것도 아십니까? ‘껍질’ 때문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껍질은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하지 않은 물질’입니다. 묶어서 그녀의 목에 걸려는 것은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물질’, ‘껍데기’겠지요. ‘껍데기’를 ‘껍질’이라고 잘못 쓴 건데, 알고 그랬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의 뜻도 모르면서 노랫말을 지었다고 비난하는 건 너무 성급합니다. ‘조개껍질’을 ‘조개껍데기’로 바꿔서 노래해 보세요. 좀 이상하지요? 예술의 영역에 국어사전을 들이대기는 좀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명품’입니다. 명품이 뭔가요? 핸드백, 구두, 옷, 시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요. 특이점은 모두 외제. 국산은 없습니다. 게다가 가격이 어이없게 비쌉니다. 그런데도 ‘명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가게 앞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간혹 있답니다. 사실 과시욕 충족을 위한 물건이니, 가격이 문제는 아닐 겁니다. 어쩌면 비쌀수록 더 명품다워지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물건을 ‘명품’이라고 할까요? 명품이라는 말로 수백만 원짜리 핸드백, 수천만 원짜리 시계가 불티나게 팔리는 사회가 건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치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느낌이 좀 달라지지 않습니까? 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지만 명품으로 자신을 과시하던 ‘있는 분’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어쩌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루저’들의 못된 심보라고, 매도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있는 분들과 싸워 이기기는 쉽지 않을 테니 타협하시지요. ‘고가품’ 정도면 어떨까요? <자료=캔바, 이미지 작업=정지수 기자> ‘명품’ 못지않게 고민스러운 용어가 ‘투자’와 ‘투기’입니다. 투자와 투기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합니다.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뿐, 본질은 같다는 의미겠지요. 똑같은 행위를 한쪽에선 투자, 또 다른 쪽에서는 투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확실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투자’는 스마트하고 긍정적이지만, ‘투기’는 부정적이고 반사회적인 느낌을 줍니다. 사실 이 점이 문제를 더 키웁니다. 모두 자기는 투자한다고 주장합니다. 투기라고 인정하는 순간 몹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요. 결국 우리 사회에서 투자와 투기는 합의된 정의가 없이, ‘내로남불’ 식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미가 다른 용어는 소통을 어렵게 하고, 오해와 불신, 나아가 적개심만 키웁니다. 두 용어의 정의와 차이를 명확히 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쉽지 않아 보이는 작업을 국어사전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의미와 차이가 이해되나요? 사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사전은 잠시 접어두고, 일상에서 두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혼용되고 있지만, 투기가 넘볼 수 없는 ‘투자만의 영역’이 있습니다. 자기 계발에 투자, 사회 인프라 투자, 교육 또는 의료 환경 개선에 투자, 국방력 강화를 위한 투자, 미래에 대한 투자, 사업에 투자 등입니다. 이 영역에 ‘투기’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투기만의 영역’도 있을까요? 찾지 못했습니다. 투기도 투자라고 우겨야 할 판에 굳이 그런 영역을 고집할 이유는 없겠지요. 이제 남은 건 투자, 투기라는 용어기 뒤섞여 쓰이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부동산, 주식, 파생상품, 외환, 원자재, 미술품, 가상화폐 등이 대상입니다. 두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사전에 따르면 투자와 투기는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인데, 그 형태에 차이가 보입니다. 투기는 돈을 목적으로 하지만, 투자는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투자만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교육에 투자하는 목적이 돈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추구하는 이익의 형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투자도 돈이 직접적인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삼성이 미국에 투자하는 이유는 돈을 벌자는 것이지, 미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부수적인 일입니다. 투자와 투기가 똑같이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둘 사이에 차이는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와 투기가 혼용되는 영역에서 그 차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는 점이 방증입니다. 몇 가지 견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소요 시간을 기준으로 장기는 투자, 단기는 투기라는 구분은 꽤 익숙합니다. 목표 수익률이 합리적이면 투자, 과도하면 투기라는 견해도 있고, 손실을 감당할 수 있으면 투자, 불가능하면 투기랍니다. 투자는 이성적 판단에, 투기는 감정적 요인에 좌우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제시한 기준이 너무 추상적, 주관적이어서 오히려 논란을 더 키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접어두었던 국어사전을 다시 펼쳐봐야겠습니다. 사전에는 투기를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차익을 얻기 위하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세차익‘을 쫒는 게 투기라는 겁니다. 이제 왜 투기가 부정적, 반사회적 느낌을 주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시세차익을 노리는 행동은 생산 활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시세차익은 불로소득입니다. 불로소득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투자와 투기의 정의와 차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투기는 ‘돈을 벌기 위해 시세차익을 노리는 행위’입니다. 투자와 투기가 혼용되는 영역에서 많은 경우는 사실 투기입니다. 투자는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설령 돈을 추구하는 경우라도 그 방법이 시세차익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동산 매입은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겠다는 계산이니, ‘투기’입니다. 반면에 땅을 사서 나무를 심고 가꾸어 과수원을 만든다면 ‘투자’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시세차익을 노리는 건 아닙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게 주식 투자라는 건 틀린 말입니다. 그건 투기입니다. 배당으로 돈을 벌겠다는 ‘배당 투자’는 예외적입니다. 주식은 투기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국어사전과 약간의 고민만으로 어렵지 않게, 아니 쉽게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찾아냈습니다. 이상합니다. 왜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쉬운 일을 포기하고, 투자와 투기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을까요? 혹시 투기를 위해 ‘쉴드’친 건 아닐까요? 언론에 대해서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단적인 예로 ‘갭투기’를 ‘갭투자’로 만들었습니다. 네이버 뉴스에서 ‘갭 투기’를 조회해 보면 관련 기사는 올해 들어 단 7건입니다. 반면 ‘갭투자’라는 용어를 쓴 기사는 세다 잠들 정도로 많습니다. 언론은 투기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은 걸까요? 이런 분위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투기와 무관한 것 같지 않습니다. 투기하는 당사자는 물론, 그들과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 입장에서는 투기라는 거친 표현보다는 투자라는 좋은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길 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노력(?) 덕인지, 투기는 투자와 ‘비슷한 말’이 되어가고 있고, 부정적, 반사회적 느낌도 퇴색됐습니다. 시세차익은 불로소득이라는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고, ‘투기가 왜 나쁘냐?’고 반문합니다. 투기에 대한 편견(?)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능하지 않을 ‘투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아닙니다. 투자와 투기를 화두로 꺼낸 이유는 우리 사회에 투자로 포장된 투기 열풍이 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투기 없는 사회는 없겠지만, 투기가 선을 넘어간 사회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투기가 아니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투기 재능을 타고났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투기해야지요. 그런데 꼭 하고 싶은 말은 ‘집’을 대상으로 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필수재이자 공공재입니다. ‘집 투기’ 때문에 누군가의 삶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출산율 저하로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답니다. 아이를 안 낳는 이유 중 하나는 투기로 치솟은 집값 때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랍니다. ‘집 투기’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을 마냥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투기 열풍은 젊은이들이 주력이 되고 있기에 더 걱정스럽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투기에 몰두하고 있는 20~30대의 모습이 너무 익숙합니다. ‘헬 조선’에서 투기가 아니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어도 괜찮을까요? 우리 사회가 답할 때입니다. ■ 작가 한동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 23기로 군복무를 마친 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중앙개발과 삼성증권에서 인사, 법인영업을 거쳐 지점장으로 10년간 근무했다. 30여년 삼성맨을 마무리한 그는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네이버 블로그 '까칠한 이야기'를 통해 돈, 금융 그리고 세상에 대한 '썰'을 재밌게 풀어내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글은 뷰어스에서 우선적으로 게재하며, 추후 작가의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다.

[한동희의 까칠한이야기] 껍데기, 명품, 투자와 투기

한동희 승인 2023.09.10 08:00 | 최종 수정 2023.09.10 09:36 의견 1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 노래를 아시지요? 혹시 노랫말이 엉터리라는 것도 아십니까? ‘껍질’ 때문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껍질은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하지 않은 물질’입니다. 묶어서 그녀의 목에 걸려는 것은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물질’, ‘껍데기’겠지요.

‘껍데기’를 ‘껍질’이라고 잘못 쓴 건데, 알고 그랬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의 뜻도 모르면서 노랫말을 지었다고 비난하는 건 너무 성급합니다. ‘조개껍질’을 ‘조개껍데기’로 바꿔서 노래해 보세요. 좀 이상하지요? 예술의 영역에 국어사전을 들이대기는 좀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명품’입니다. 명품이 뭔가요? 핸드백, 구두, 옷, 시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요. 특이점은 모두 외제. 국산은 없습니다. 게다가 가격이 어이없게 비쌉니다. 그런데도 ‘명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가게 앞에서 밤을 새우는 일도 간혹 있답니다.

사실 과시욕 충족을 위한 물건이니, 가격이 문제는 아닐 겁니다. 어쩌면 비쌀수록 더 명품다워지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물건을 ‘명품’이라고 할까요? 명품이라는 말로 수백만 원짜리 핸드백, 수천만 원짜리 시계가 불티나게 팔리는 사회가 건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사치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느낌이 좀 달라지지 않습니까? 말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지만 명품으로 자신을 과시하던 ‘있는 분’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어쩌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루저’들의 못된 심보라고, 매도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있는 분들과 싸워 이기기는 쉽지 않을 테니 타협하시지요. ‘고가품’ 정도면 어떨까요?

<자료=캔바, 이미지 작업=정지수 기자>


‘명품’ 못지않게 고민스러운 용어가 ‘투자’와 ‘투기’입니다. 투자와 투기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합니다.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뿐, 본질은 같다는 의미겠지요. 똑같은 행위를 한쪽에선 투자, 또 다른 쪽에서는 투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확실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투자’는 스마트하고 긍정적이지만, ‘투기’는 부정적이고 반사회적인 느낌을 줍니다. 사실 이 점이 문제를 더 키웁니다. 모두 자기는 투자한다고 주장합니다. 투기라고 인정하는 순간 몹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요.

결국 우리 사회에서 투자와 투기는 합의된 정의가 없이, ‘내로남불’ 식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미가 다른 용어는 소통을 어렵게 하고, 오해와 불신, 나아가 적개심만 키웁니다. 두 용어의 정의와 차이를 명확히 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쉽지 않아 보이는 작업을 국어사전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의미와 차이가 이해되나요? 사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사전은 잠시 접어두고, 일상에서 두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혼용되고 있지만, 투기가 넘볼 수 없는 ‘투자만의 영역’이 있습니다. 자기 계발에 투자, 사회 인프라 투자, 교육 또는 의료 환경 개선에 투자, 국방력 강화를 위한 투자, 미래에 대한 투자, 사업에 투자 등입니다. 이 영역에 ‘투기’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투기만의 영역’도 있을까요? 찾지 못했습니다. 투기도 투자라고 우겨야 할 판에 굳이 그런 영역을 고집할 이유는 없겠지요. 이제 남은 건 투자, 투기라는 용어기 뒤섞여 쓰이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부동산, 주식, 파생상품, 외환, 원자재, 미술품, 가상화폐 등이 대상입니다.

두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사전에 따르면 투자와 투기는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인데, 그 형태에 차이가 보입니다. 투기는 돈을 목적으로 하지만, 투자는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투자만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교육에 투자하는 목적이 돈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추구하는 이익의 형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투자도 돈이 직접적인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삼성이 미국에 투자하는 이유는 돈을 벌자는 것이지, 미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건 부수적인 일입니다.

투자와 투기가 똑같이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둘 사이에 차이는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와 투기가 혼용되는 영역에서 그 차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져 왔다는 점이 방증입니다. 몇 가지 견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소요 시간을 기준으로 장기는 투자, 단기는 투기라는 구분은 꽤 익숙합니다. 목표 수익률이 합리적이면 투자, 과도하면 투기라는 견해도 있고, 손실을 감당할 수 있으면 투자, 불가능하면 투기랍니다. 투자는 이성적 판단에, 투기는 감정적 요인에 좌우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제시한 기준이 너무 추상적, 주관적이어서 오히려 논란을 더 키우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접어두었던 국어사전을 다시 펼쳐봐야겠습니다. 사전에는 투기를 ‘시세 변동을 예상하여, 차익을 얻기 위하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세차익‘을 쫒는 게 투기라는 겁니다. 이제 왜 투기가 부정적, 반사회적 느낌을 주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시세차익을 노리는 행동은 생산 활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시세차익은 불로소득입니다. 불로소득이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투자와 투기의 정의와 차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투기는 ‘돈을 벌기 위해 시세차익을 노리는 행위’입니다. 투자와 투기가 혼용되는 영역에서 많은 경우는 사실 투기입니다. 투자는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설령 돈을 추구하는 경우라도 그 방법이 시세차익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동산 매입은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겠다는 계산이니, ‘투기’입니다. 반면에 땅을 사서 나무를 심고 가꾸어 과수원을 만든다면 ‘투자’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시세차익을 노리는 건 아닙니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게 주식 투자라는 건 틀린 말입니다. 그건 투기입니다. 배당으로 돈을 벌겠다는 ‘배당 투자’는 예외적입니다. 주식은 투기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국어사전과 약간의 고민만으로 어렵지 않게, 아니 쉽게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찾아냈습니다. 이상합니다. 왜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은 이렇게 쉬운 일을 포기하고, 투자와 투기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을까요? 혹시 투기를 위해 ‘쉴드’친 건 아닐까요?

언론에 대해서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단적인 예로 ‘갭투기’를 ‘갭투자’로 만들었습니다. 네이버 뉴스에서 ‘갭 투기’를 조회해 보면 관련 기사는 올해 들어 단 7건입니다. 반면 ‘갭투자’라는 용어를 쓴 기사는 세다 잠들 정도로 많습니다. 언론은 투기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은 걸까요?

이런 분위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투기와 무관한 것 같지 않습니다. 투기하는 당사자는 물론, 그들과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 입장에서는 투기라는 거친 표현보다는 투자라는 좋은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길 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노력(?) 덕인지, 투기는 투자와 ‘비슷한 말’이 되어가고 있고, 부정적, 반사회적 느낌도 퇴색됐습니다. 시세차익은 불로소득이라는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고, ‘투기가 왜 나쁘냐?’고 반문합니다. 투기에 대한 편견(?)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능하지 않을 ‘투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아닙니다. 투자와 투기를 화두로 꺼낸 이유는 우리 사회에 투자로 포장된 투기 열풍이 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투기 없는 사회는 없겠지만, 투기가 선을 넘어간 사회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투기가 아니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투기 재능을 타고났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투기해야지요. 그런데 꼭 하고 싶은 말은 ‘집’을 대상으로 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필수재이자 공공재입니다. ‘집 투기’ 때문에 누군가의 삶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출산율 저하로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진답니다. 아이를 안 낳는 이유 중 하나는 투기로 치솟은 집값 때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랍니다. ‘집 투기’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을 마냥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투기 열풍은 젊은이들이 주력이 되고 있기에 더 걱정스럽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투기에 몰두하고 있는 20~30대의 모습이 너무 익숙합니다. ‘헬 조선’에서 투기가 아니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어도 괜찮을까요? 우리 사회가 답할 때입니다.

■ 작가 한동희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 23기로 군복무를 마친 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중앙개발과 삼성증권에서 인사, 법인영업을 거쳐 지점장으로 10년간 근무했다. 30여년 삼성맨을 마무리한 그는 퇴직한 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네이버 블로그 '까칠한 이야기'를 통해 돈, 금융 그리고 세상에 대한 '썰'을 재밌게 풀어내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글은 뷰어스에서 우선적으로 게재하며, 추후 작가의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다.

저작권자 ⓒ뷰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