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인근 세종대로에서 열린 '의료정상화를 위한 전국의사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과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운영 등을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딱 1년 반 전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시는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걸으면 자꾸 앞으로 넘어질 것 같다며 문밖출입을 꺼리셨다. “방에만 계시면 근육이 다 빠진대요”를 몇 번 반복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파킨슨 증상과 유사해 지역 내 노인전문병원에 모시고 갔다. 의사 선생님 역시 파킨슨 소견이었으나, 정확한 진단은 일단 약을 복용하고 차도가 있으면 파킨슨이고, 없으면 더 정밀한 검사를 해본 뒤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현관 도어락 건전지를 교체해야 될 것 같다는 얘길 낮에 하시곤 저녁에 당신 호주머니에 만져지는 새 건전지는 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가슴이 덜컥해 그 주, 다니신 적 있는 한 종합병원에 모시고 가 MRI(자기공명영상)를 포함한 검사들을 받았다.

“노화로 뇌가 작아졌어요.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데….”
“네? 입원까지요? 파킨슨 아닌가요?”
“파킨슨 같기도 해요. 그럼 우선 파킨슨 약 드시고 치매 패치를 붙이면서 경과를 보시겠어요?”

신경외과 선생님의 심드렁한 권고에 두 달 치, 그리고 나서 또 세 달 치 약을 받아 매일 빠짐없이 드시고 붙이셨다. 그러던 어느 주말, 집에 들어서니(나이 드신 부모님의 일상을 살피러 필자는 주말마다 친정에 간다) 얼굴 가득 걱정을 넘어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가 “아버지가 이젠 소변 실수까지 하신다”며 한숨을 쉬셨다.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후 몇 주는 우리 가족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필자는 주변의 파킨슨이나 약한 치매를 겪고 계시는 분들을 떠올려 봐도 이렇게 급격한 악화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혹시 스트레스가 악화를 시켰나?’ 의학 학술지를 포함해 미친 듯이 구글링을 했다. 그러다 어느 의학 전문지에 아버지와 유사한 증상을 설명하는 글을 찾았다.

‘정상압 수두증. 뇌실이 넓어져 물이 차는 병. 처음에는 파킨슨과 유사한 보행장애를 보이다 점차 인지기능 저하와 요실금 및 배변 장애가 나타나는 질환!’

마음이 급해졌다. 다음 진료 예약까지는 두 달도 더 남았지만 가족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옥 사역보다 더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기에 최대한 빠른 날짜로 당겨 몸도 잘 못 가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신경외과 선생님을 마주했다.

“이렇게 급격한 악화는 이상해서 찾아보니…, 혹시 정상압 수두증 아닌가요?”
“저도 그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처음 앞뒤 설명 없던 입원 얘기가 그럼!!!)”
“약도 없고 수술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요?”
“네. 일단 입원하셔서 뇌척수액 검사를 받아보셔야 하고…, 그게 맞으면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그럼 입원하겠습니다. 수술 최대한 빨리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은 곤란합니다. 의료파업 중이라….”
“그런 언제 가능한가요?”
“언제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파업이 끝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100% 그 병이라 확신할 수도 없고…, 노인분들은 비뇨기 등 다른 질환으로 그런 증상이 올 수도 있으니 일단 비뇨기과 연결해 드릴 테니 그쪽 검사를 먼저 받아 보세요.”
“(아니!!! 뭐라고요???)……네.”

절망과 분노가 목에 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지만, 일단 자력으로는 그 어떤 처방 처치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을’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밤이면 본인의 소변도 못 가리시는 분에게 비뇨기과에서 해오라고 시킨 소변 주기와 양 측정은 너무도 어려운 임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 분야 의사인 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하니 “정상압 수두증이 맞는 듯하고, 어려운 수술이 아니니 수술 가능한 병원을 빨리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줬다. 일단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종합병원은 아니나 제법 규모가 큰 병원에서 수술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버지는 일주일 후 입원을 하셔서 바로 수술을 받으셨고, 빠르게 2년 전의 상태로 회복하시어 지금은 낮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며 혼자 일상을 영위하신다.

■ 대다수 '을'이 진료실서 겪는 절망과 분노

이 일을 겪은 후 필자의 관심은 온통 고령화 사회에서의 ‘웰 에이징(well-aging)’과 ‘인간다운 노년 생활’을 돕는 서비스와 정책에 꽂혔다. 더욱이 대한민국 사회는 2024년 12월 23일을 기점으로 65세 이상이 전체 주민등록 인구의 20%(1024만4550명)를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상태다. 갈수록 노인 인구의 비중은 높아질 텐데 ‘주치의’는 어디 외국 영화나 높으신 분들 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전속 의료서비스일 뿐,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체감하는 의료서비스는 우리 모두 바로 떠오르는 그 장면들과 같다.

유행병이라도 돌면 오픈런을 해 한참을 기다리다 3분 내외의 진료(그 짧은 시간이나마 의사 선생님은 나보다는 컴퓨터 화면을 주로 보고 입력에 열중하신다)를 보고 약을 받아 오는 건 그래도 호사에 가깝다. 노인이 되면 고혈압은 기본이고 관절염, 신경통, 불면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려 늘 먹던 약에 추가로 약을 잔뜩 받아와 같이 복용하면 되는지, 안 되는지 구분도 못 한 채 한꺼번에 몽땅 삼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못만 보인다 했던가. 작년 그 일이 있고 난 후, 매년 정부 사업에 지원하거나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 중 바이오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왔다. 2023년부터 본격 시작한 정부의 의료 마이데이터 사업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질병관리청 등의 자료가 제한적으로나마 이용 가능해진 덕인지, 의료 인력 부족으로 고달파진(?) 의사 선생님들의 문제해결 창업이 늘어난 덕인지 사업에 지원한 스타트업들의 서비스에는 반가워 눈이 절로 반짝여지는 서비스들이 상당했다.

‘리터러시엠’이라는 앱은 국내 상당 수의 병원들과 연계해 내가 받은 처방전과 건강검진 결과를 넣으면 동시 복용하면 안되는 약을 알려준다. (현행 의료법상 진단과 처방은 의사의 ‘직접 진찰’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나의 지병 관리에 도움을 줄 의사들의 설명 동영상들을 온라인 상으로 연결해 주기도 한다. 환자 스스로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세심히 챙겨주는 탐나는 서비스였다. 이 기업은 현재 LG전자(TV)와 협력해 미국 홈케어 서비스 시장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또 최근 접한 모 의료기기 기업은 웨어러블 디바이스 착용을 통해 91% 이상의 정확도로 14일 이내 부정맥 발생 가능성을 진단해 낼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현재 병원 건강검진에서 하는 10초짜리 심전도 검사로는 대부분의 부정맥을 진단하지 못한다고 한다. 서울 종합병원 의사 출신인 회사 대표는 그간 축적된 의료데이터를 AI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한계를 극복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예민해진 기업들이 위험 현장에 투입하는 중·장년층에게 자사 서비스를 적용해 갑자기 쓰러지는 사고를 예방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 AI 기반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거는 기대

최근 AI에이전트의 급속한 발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알고 있듯이 AI 기반 의료 영상 판독은 이미 오래 전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었다.(루닛, 뷰노와 같은 상장기업 외에도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우리 초기 스타트업들이 조금씩 개방·공유되는 의료데이터를 활용해 많은 맞춤형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성형 AI를 의료시스템에 접목시키는 기술의 발달로 의사들은 컴퓨터 화면이 아닌, 오롯이 환자들과의 대화와 상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 영국, 호주 등 디지털 헬스케어 강국들과 비교하면 정책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높고 많다.

얼마 전 포브스지에 세계 최초의 건강 슈퍼앱이라는 ‘슈퍼파워(SuperPower)’가 3000만 달러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 서비스를 창업한 대표들의 문제 인식이다. 창업자 제이콥 피터스는 전문의들이 오진한 질환을 치료하는데 200만 달러를 쏟아붓고도 목숨을 잃을 뻔했고, 공동 창업자 맥스 마르키오네 역시 수십 년간 20명의 의사에게 오진을 받으며 건강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인의 40%는 적절한 정보만 있다면 조기에 치료할 수 있는 예방 가능한 질환을 앓고 있는데 중요한 건강 데이터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2023년 슈퍼파워를 창업했다.

슈퍼파워의 서비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간 499달러(72만원)의 회비를 내면 21개 범주에 걸쳐 100개 이상의 혈액 바이오마커를 분석하는 2년 주기 검사 서비스를 제공한다. 개인의 과거 의료 기록 및 유전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며, 이 데이터들을 전 세계 모든 건강 지식과 연결해 개인의 고유한 생물학적 특성을 기반으로 맞춤형 프로토콜을 생성한다. 아울러 회원은 건강 문제에 대해 AI와 의료 전문인력의 하이브리드 서비스로 휴대폰을 통해 24시간 상담받을 수 있고, 증상이 나타나기 전 50가지 이상의 암 유형을 감지하는 추가 검사 서비스까지 활용 가능하다.

■ 탐나는 호주의 헬스케어 국가 플랫폼

문득 좋은 못을 발견한 망치쟁이의 심정이 되살아났다.

‘이런 서비스를 우리 아버지가 받으셨다면?’
‘AI 영상판독과 추론으로 불필요한 진료 과정을 건너뛰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Why not? 안 될 게 뭐 있겠나!’

앱과 서비스는 국경을 초월한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마이데이터 사업은 올해 3월부터 겨우 시범 실시 중이고, 우리의 의료데이터는 미국만큼 표준화돼 있지 않으며,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의 한계로 디지털 헬스케어 특별법이라도 통과되지 않는 한, 조속한 시일 내 기관별로 흩어져 있는 나의 데이터를 수요자(환자) 중심으로 모아 원하는 곳에 전송·활용할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 이에 슈퍼파워 앱이 미국 시민에게만큼 내게도 맞춤형 서비스를 온전히 제공해 줄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필자는 희망한다. 새 정부는 뒷북이어도 좋으니 AI 개발도, 그에 필요한 칩도, 에너지도, 인력도 모두 총력을 다해 지원해 주시길. 그리고 그에 앞서 그 AI가 모든 국민의 일상에 조속히 기여할 수 있도록 데이터의 제대로 된 활용 방안을 고민·실행해 주시길.

디지털정부 선진국인 호주는 2012년에 이미 개인 제어 전자건강기록(PCEHR)을 기반으로 하는 정책을 시작해 지금은 나의건강기록(My Health Record) 국가 플랫폼을 통해 전 국민의 90%가 데이터 기반 헬스케어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참여율은 2019년 옵트아웃(Opt-out, 정보 소유 당사자가 자신의 데이터 수집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할 때 정보 수집이 금지되는 제도)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바, 우리도 효과적인 망치와 망치질의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