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키드’라 불리는 세대가 있다면,
아마도 나는 그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다.
집은 언제나 라디오가 켜진 공간이었다.
어머니가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듣던 라디오의 시그널이 나의 알람이었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어떤 코너가 시작될 때까지 아침 식사를 마치지 못하면,
그날은 어김없이 지각이었다.
등교를 위해 217번 버스에 올랐을 때도
매일 같은 시간에 편성된 동일한 라디오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광고 끝나면, 그 광고.
그 광고 끝나면, 라디오 프로그램의 3부 시그널 음악.
점심 먹을 때 ‘정오의 희망곡’
하교할 때 ‘음악캠프’
저녁 먹고 책상에 앉았을 때 ‘볼륨을 높여요’
진짜 쇼타임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 사이다.
나의 10~20대는 신해철의 나직함과, 유희열의 장난스러움, 정지영의 따뜻함과 성시경의 짖궂음이 섞인 무언가다.
일진이 좋지 못한 날에도 밤12시에 어김없이 흐르는
‘라디오 천국’의 시그널을 들으면 응어리진 마음이 저 멀리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 이 DJ들의 정서는
지금까지 내 생각이고, 말투고, 태도다.
요컨대, 내게 라디오 시그널과 DJ의 멘트는
시간을 가늠하는 소리이자, 그날 하루가 평온하기를,
또 내일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의식이었다.
DJ가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방송을 시작한 것 같은 느낌.
그러면서도 심야에 같은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작은 공동체를 떠올리는 감각.
그리고 그들끼리만 연결되는 유대감.
아직 굳기 전의 나는, 라디오 특유의 따뜻함 속에서
귀동냥의 결과물들로 조금씩 점철되며 모양이 잡혔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최근,
유독 원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음을 느낀다.
한창 빠릿했을 때에 비하면 원고를 안고 끙끙거리는 시간이 배로 늘었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내 안에 쏟아부었던 정서들이 이제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소년의 마음일 수도 있고, 촉촉함일 수도 있다.
글에 대한 애정일 수도, 타인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런 종류의 마음이 이제 내 안에 별로 남지 않아서.
그래서 생업도 이렇게 뻑뻑하게 잘 굴러가지 않는 것이다.
마르지 않을 줄 알았다.
하긴...10대 시절이 한창이었으니, 참 오래도 길어다 썼다.
건조함이 가득한 어른의 일상에는 분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내면에서 끌어다 쓸 촉촉한 무언가가 없으면, 생활인의 시간도 앞으로 밀고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으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DJ가 바뀌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결같은 애청자로 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DJ는 DJ대로 기분에 따라 말을 적게 하는 대신 음악을 많이 내보내는 날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멘트에 한숨을 섞는 날도 있을 것이다. 애청자는 애청자대로 마음이 바쁜 날에는 방송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DJ의 말을 멍하니 흘려보내기도 하겠지. 그럼에도 한 사람은 매일 시간에 맞춰 방송을 시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라디오를 켤 것이다. 서로에 대한 예의와 신뢰와 사랑으로 늘 지금과 같은 관계를 이어가는 일. 서로를 DJ이자 애청자라 여기고 성실히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관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일. 이것이 나의, 그리고 우리의 라디오적 로맨스다.>『아무튼, 라디오』(2024) / 이애월 / 제철소
훌륭한 DJ가 추천하는 음악은 인생의 BGM이 된다.
한 곡의 음악을 소개하기 전, 음악의 러닝타임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해
곧 나올 음악이 왜, 어떻게, 얼마나 훌륭한지 설명하기 때문이다.
마치 기가 막힌 음악을 우연히 접한 10대 소년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흥분에 가득 차서 구구절절 수다를 떨 듯 음악을 소개한다.
나 역시 그 시절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알게 된 음악을 지금까지도 듣는다.
‘The bird and the bee’가 그렇고, ‘Caro Emerald’가 그렇고,
‘Aerosmith’가 그렇고, ‘Feist’가 그렇다.
지금 내게는, 그때와 같은 채움이 필요하다.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