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를 제출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공인노무사로서 활동한 15년간을 돌이켜보면, 근로자, 사용자의 노사관계에 관한 지식과 의식 수준이 상당히 발전됐음을 느낀다.

과거에는 회사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사직서를 제출한 근로자가 “내 의사와는 관계없는 사직이므로 이 사직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상담을 하거나 사건을 의뢰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가 사직을 강요했더라도 사직서를 제출하면 사실상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 결과 회사의 강요에도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는 근로자들이 늘었고, 사직서를 제출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해고를 다투는 경우도 상당히 줄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회사의 강요, 또는 격한 감정에 우발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후 크게 후회하면서 해고를 다투는 경우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정말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일까?

■ 사직서를 제출했음에도 해고로 판단되는 유일한 방법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그 사직서 제출행위가 진의 아닌 의사표시, 속칭 ‘비진의 의사표시’로 인정받는 경우다.

우선 진의 아닌 의사표시를 말하기에 앞서 사직서의 법적 성격을 정확히 짚어둘 필요가 있다. 사직서란 ‘사직의 의사가 표시된 문서’다. 방점은 문서가 아닌 ‘의사표시’에 있다. 문서로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고의 의사표시는 반드시 서면으로 해야 하지만, 사직의 의사표시는 서면을 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두의 의사표시도 효력이 있고 심지어 문서, 구두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근로관계 종료 전후의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사직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다.

사직의 의사표시에 관해서는 노동관계법령이 아닌 민법을 살펴봐야 한다. 민법 제107조에서 “의사표시는 표의자가 진의아님을 알고 한 것이라도 그 효력이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표의자의 진의아님을 알았거나 이를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무효로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조문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한 후 해고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사직의 의사표시가 진의아님을 상대방(사용자)이 알거나 알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대부분 “제가 수차례 거부했는데도 강요와 압박에 못이겨서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었으니, 상대방(사용자)은 제가 사직할 마음이 없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라는 취지로 주장한다.

안타깝지만 인정되지 않는다. 법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진의아닌 의사표시 해당 여부의 판단은 그 의사표시를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예를 들어 근로자가 수차례 사직할 의사가 없음을 알렸음에도 그 후 회사가 위로금을 제시하거나, 사직하지 않으면 징계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해악을 고지해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 최초 권고시점부터 상당 기간 근로자가 사직할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상대방에게 알렸음에도, 사직서를 작성할 그 시점에는 위로금을 받거나 해악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볼 여지가 외견상 인정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용자의 회유, 강요가 인정되더라도 진의아닌 의사표시로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사직서를 제출했음에도 해고로 인정될 여지가 있는 사례

사직에 관한 진의아닌 의사표시를 법으로 설명하기엔 지면상 한계가 있고, 내용 또한 재미가 없어질 것이니 사직이 해고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몇 가지 케이스를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사실상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1. 근로자 집단에게 사직서를 받고 그 중 일부를 사용자가 선별 수리하는 경우
2. 조건부 사직서를 제출받고 그 조건이 달성되기 전임에도 사직 처리하는 경우
3. 사직할 목적이 아닌 다른 의도(항의, 근로조건 개선요구 등)로 사직서를 제출했음이 증명되는 경우
4. 격분하여 홧김에, 또는 만취한 상태에서 사직의 의사표시를 한 경우
5. 사회초년생, 고령자 등 사직서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또는 수백건의 의사표시를 하면서 살아간다. 출근하면서 버스나 지하철에 탑승하는 행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행위 및 비즈니스 목적의 통화, 이메일 등에는 대부분 표의자의 의사표시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의사표시 후 표의자가 그 의사표시를 취소하면서 내심의 의사와는 다른 것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의사표시 후 마음이 바뀌었다는 주장을 허용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음식점 예약을 해놓고 ‘노쇼’를 하면서 “사실 저는 갈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예약한 것이다”라는 변명을 인정해주는 것이 맞을까? 입사지원자에게 최종 합격통지를 해 기존 다니던 회사를 퇴사케 해놓고, 마음이 바뀌었다며 채용을 취소하면 누구를 보호하는 것이 맞을까?

따라서 사직이 해고로 바뀌는 마법 같은 일 역시 극히 예외적으로만 인정돼야 한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라는 격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기다.


■ 이종언 노무사는 현재 노무법인 평정의 대표 노무사로서 고려대학교 재료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2008년 공인노무사 자격을 취득한 후 LG이노텍 인사담당 과장, 노무법인 유앤 수석노무사를 역임했다.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사건을 다수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기업자문, 해고사건 수행, 관련 컨설팅 및 유튜브 채널 [해고라광장]을 운영하는 등 해고와 관련되어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