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 한 정비사업 공사 현장. (사진=손기호 기자)
정부가 산업현장의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해 강력한 경제적 제재를 도입하기로 했다. 특히 사망사고가 반복될 경우 해당 기업의 법인에 최소 30억원으로 영업이익의 5%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된다. 산업재해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건설업을 중심으로 제재 수위가 대폭 상향된 셈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시공사에만 책임을 집중시키는 것은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장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발주자와 정부도 함께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 정부, '법인 기준' 과징금 도입…공시 의무화·투자제한까지 확대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는 전날(15일) '노동안전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사망사고가 반복되는 기업에 대해 법인 단위의 경제 제재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연간 3명 이상이 사망할 경우에는 법인의 영업이익 5% 이내에서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이 골자다. 영업이익이 적더라도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건설사는 최소 3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과징금 부과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과징금심사위원회'를 신설하고 사망자 수와 사고 빈도 등 위험도에 따라 차등 적용한다는 계획이다. 징수된 과징금은 산업재해예방보상보험기금에 편입돼 재투자된다.
또 중대재해 발생 사실은 지체 없이 공시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벌점이 부과된다. 벌점은 영업정지, 입찰 제한, 주식 거래 정지 등 다양한 규제 조치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투자 판단 기준에도 반영되고, 금융권 신용평가·대출금리·보험요율 등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 건설업은 특별관리 대상…입찰 제한·등록말소 요건도 강화
문제는 산업재해 사망자의 절반이 건설업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올해 들어서 건설사들에 대한 제재 수위가 특히 강화됐다. 올해 상반기 사망자 287명 중 48%인 138명이 건설업에서 발생한 만큼 제도의 핵심 타깃이 되고 있다.
정부는 영업정지 요청 요건을 '동시 2명 사망'에서 '연간 누적 다수 사망'으로 확대한다. 제재 대상은 전기·정보통신·소방시설 공사 등으로 넓혔다. 영업정지 처분을 두 차례 이상 받고 다시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건설업 등록말소 요청까지 가능해진다. 한마디로 회사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입찰 제한도 강화된다. 기존에는 동시 사망 2인 이상일 때 공공입찰 제한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연간 사망자 3인 이상이면 민간·민자 사업장까지 포함해 입찰 제한이 가능하다. 제한 기간도 최대 3년까지 늘어난다.
정부는 또 적정 공사비 산정과 공사기간 확보를 제도적으로 강제해 하청업체가 실질적인 안전관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안전보건관리비 계상의무 주체를 발주자에서 원청까지 확대하한다. 폭염 등 기상 요인을 공기 연장 사유로 명시하고 민간공사의 도급계약서에도 공기 산정 기준을 포함하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 "수천억 안전비용 들여도 사고 일어나…시공사 책임만으론 한계"
최근 만난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이번 정부의 대책안 관련 "사망 사고는 없어야 하지만 건설업계 특성상 한계가 있어서, 모든 책임을 지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5년간 사망사고가 꾸준히 줄었고 올해도 거의 없었지만 결국 한 건의 사고가 발생했다"면서 "당사는 1500억원이 넘는 안전 투자와 하청사 지원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전국 100여곳 넘는 현장을 운영 중인데 통제에 현실적 한계가 있다"면서 "모든 현장에서 안전교육과 안전요원까지 배치하지만, 일용직과 외국인 근로자 등이 많은 건설업 특성상 개인이 이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렇다고 직접 고용을 통해 지속적인 안전교육을 할 수도 없다"며 "건설업은 한 공사가 끝나면 다음 공사를 수주해 투입되기까지 공사에 투입됐던 인원이 일이 없기 때문에 일용직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이 관계자는 "최근 한 건설산업 보고서에서 영국의 건설 안전관리 제도 사례를 봤는데, 그처럼 발주처, 설계자, 정부까지 안전 책임을 분담하고, 적정 공사비와 공기 확보를 보장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 영국은 발주자 책임 강조…"안전 위해 공사비·공기 연장이 기본"
이 건설사가 언급한 영국의 사례와 관련해,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작성한 '영국 건설산업의 안전보건관리제도'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건설안전 체계는 시공사 단독 책임 구조에서 벗어나 발주자·설계자·시공사가 함께 책임을 분담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
영국에서는 사고가 발생하면 발주자의 법적 책임이 매우 크다. 단순히 예산을 지급하는 주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할 법적 의무가 부여된다. 이를 소홀히 하면 거액의 민사 배상 책임을 져야 하며, 설계 단계부터 시공사가 안전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영국에서는 공사 기간이 부족할 경우 시공사의 '공기 연장 요구'가 정당한 권리로 인정된다. 실제로 공기 연장이 보편화돼 있다. 이는 무리한 일정 압박이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다. 반면 한국은 '공기 준수'가 최우선으로 여겨지며 이는 안전사고를 부르는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도 2021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통해 발주자가 '적정한 비용과 기간'을 계상하도록 의무화했지만, 위반 시 과태료 1000만원 이하에 그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현장에서는 이 조항이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보고서는 "건설현장의 안전은 단순히 처벌 강화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사업 수익을 얻는 모든 주체가 안전을 전제로 책임을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일 경기도 광명시 신안산선 지하터널 공사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11일 경기도 광명시 양지사거리 부근 신안산선 복선전철 제5-2공구 지하터널 공사 현장과 상부 도로가 함께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연합)
■ "제도보다 실행력이 과제…적정 공기·공사비가 핵심" 지적
이은형 대한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정부 대책은 상당히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적정 공기와 공사비를 함께 다룬 점은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영업정지, 공공공사 입찰 제한, 등록 취소, 외국인 고용 제한 등 페널티는 법 개정만으로도 곧바로 시행할 수 있지만, 적정 공기와 공사비가 실제 현장에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안전한 시공과 품질 확보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결국 사회가 감수해야 할 몫이지만, 현실에서는 재개발·재건축 조합원들조차 '공사비를 낮춰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결국 공사비를 낮게 제시하는 건설사가 입찰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는 안전 관련 비용이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한국의 안전 제도는 이미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사회적 인식은 아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간극이 존재한다"면서 "제도와 규정을 현장에서 제대로 준수하는 실행역량이 커질수록 이러한 간극도 점차 해소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