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도서는 무엇일까?
바로 중고생의 필독서 <수학의 정석>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누적 판매량이 대략 5000만 부를 상회하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1960년대 당시 국내 수학 참고서의 열악한 수준에 실망해 ‘족집게 강사’였던 홍성대가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 자료를 섭렵하며 3년을 매달린 끝에 초판을 내놓았다. 출판을 앞두고 책 제목을 고민하던 저자가 바둑에서 가져온 제목이 불후의 명저의 유래가 되었다. 결국 학생들이 가장 많이 공부한 참고서의 제목이 바로 바둑 용어인 것이다. 앞서 바둑의 정석이 사라지고 있는 바둑계 현실을 직격한 바 있는데, 학령인구가 줄어든 참고서 시장에서 수학의 정석은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10. 가장 오랜 역사, 가장 빠른 변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두뇌 스포츠, 바둑.
동양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존재를 상대로 서양 문물을 상징하는 최첨단의 알파고가 도전장을 던진 것도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결국 AI는 바둑이라는 장벽을 넘어섰고, 바둑계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가 없는 조용한 동네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속도가 남달랐다.

AI가 바둑 세상의 모든 것을 뒤집었다. 수백 년 동안 고수했던 정석(定石)이 시나브로 사라졌고, AI 정석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최정상 고수들이 연구했던 숱한 정석들은 극강의 AI 앞에서 몰락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삼연성(三連星)이나 눈사태 같은 정석들은 AI 바둑의 완력 앞에 힘없이 자취를 감췄다.

알파고의 등장은 바둑계의 연호를 AD(After DeepMind)와 BC(Before Computer)로 나눌 만큼 강력한 충격을 안겼다. 올해로 AD 9년. 딥마인드가 만든 알파고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후 AI 바둑의 나이는 고작 9살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파고 이후 봇물처럼 쏟아진 AI 바둑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이미 완숙한 경지에 도달했다.

이세돌이 “AI를 이길 수 없는 바둑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은퇴한 것은 단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는 “AI 시대에 인간의 창의성과 고유한 가치는 어떻게 지속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과 함께 인간 바둑의 지속성에 대한 화두를 남겼다.

AI와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다. AI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인식하고 결과를 도출하는데 탁월하지만, 인간은 직관, 창의성, 감정, 윤리적 판단 등 복잡하고 맥락 의존적인 영역에서 강점을 보인다. AI는 모든 수를 분석하고, 승률을 예측하며, 최고의 한 수를 계산한다. 반면 인간이 바둑을 두는 이유는 승부 외에도 ‘예술’과 ‘도(道)’의 의미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다.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바둑이 불과 9년 만에 모든 것을 갈아 입었다. 바둑의 정석뿐만 아니라, 바둑계의 모든 일상을 바꾼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바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이제 바둑은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11. 기도(棋道)는 없고, 기술(棋術)만 남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던 바둑.
바둑을 기도(棋道)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지혜와 전략, 삶의 철학을 담고 있는 예술과도 같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AI는 바둑의 전통적인 가치와 본질적 의미를 허물고 일순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AI 메가트렌드에 파묻혀버린 바둑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개성이 사라진 바둑이다.

지금까지 단 한 판도 같은 수순의 기보(棋譜)가 나온 적이 없었던 바둑에서 이제는 비슷비슷한 수순의 바둑이 속출하고 있다. 기존의 다양한 개성은 사라지고, AI 바둑의 수법을 얼마나 잘 외워서 활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뿐이다. 더 이상 AI는 바둑 학습을 위한 도구에 머물지 않고, 승리를 위한 유일한 스승이자 절대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전신(戰神)’ 조훈현,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신산(神算)’ 이창호.
당대 최고의 프로기사들에게 붙은 주옥 같은 닉네임들이다. 그들의 바둑을 보면 특유의 기풍(棋風)이 있었고, 독특한 개성이 드러났다. 자신의 바둑을 바탕으로 때로는 피가 튀길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때로는 인간적인 낭만이 반상에 넘쳐났다.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에게 유일한 승리를 안겼던 신의 한수도 이세돌 특유의 직관과 창의성에서 발현된 것이다. 직관과 창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적 매력이 떨어진 바둑은 그저 AI 바둑이 빚어내는 인간들의 대리전에 불과할 뿐이다.

오랜 시간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던 목진석 9단은 “AI 학습은 좋은 훈련법이지만 좋은 선생이 나왔다고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기사들의 개성이 사라져가는 추세에 천편일률적인 바둑을 두면 팬들은 떠나고 결국 도태될 것이다. 최소한 자기만의 색깔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팬들도 울림이 있을 것”이라며 우려와 함께 대안을 제시했다.

지난 6월 7일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열린 제6회 월드 바둑 챔피언십 결승에서 일본의 야마시타 게이코 9단을 꺾고 정상에 오른 목진석 9단 (사진=한국기원)

감독직을 내려놓고 승부사로 돌아온 그가 얼마전 월드바둑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45세 이상 시니어들이 출전하는 대회이기는 해도 이창호, 유창혁, 루이나이웨이, 야마시타 게이코 등 한중일을 대표하는 초일류 기사들을 연파하고 자신의 첫 세계대회 정상 등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우승 직후 목진석 9단이 밝힌 소회에서 AI 시대 바둑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엿볼 수 있었다.

“두고 싶은 수를 둘 수 있고, 바둑판 위에 자신만의 바둑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게 바둑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인공지능을 모방하는 것보다 저만의 바둑을 두려고 합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바둑을 두고 싶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