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셀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벤처·스타트업 업계는 역대급 유동성 과잉을 경험했다. 각국의 정부와 중앙은행이 확장적 정책을 펼치면서 시장에는 돈이 넘쳐났다. 우리나라도 2020년 3월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인하하고, 그해 5월에는 0.5%까지 추가로 낮추는 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예·적금의 매력도가 떨어지자 수익성이 높은 대체투자 상품인 벤처투자로 돈이 몰렸다. 덕분에 이 시기 창업한 스타트업들은 큰 어려움 없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실제로 국내 벤처투자 금액은 2020년 8.1조원에서 2021년 15.9조원으로 급증했고, 이런 추세는 2022년 하반기까지 지속됐다.
이렇게 활황이 계속될 것만 같았던 벤처투자 시장은 2022년 하반기, 미국의 금리 인상과 글로벌 경기 둔화, 거래소의 특례 상장 기준 강화 등의 대형 이벤트가 동시에 찾아오며 거짓말처럼 ‘혹한기’로 돌아선다.
투자자들의 위험회피 성향이 높아져 더 이상 불확실성이 큰 적자 스타트업에 공격적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경이 도래했다. 그러자 창업자들은 외부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 자금과 최소 비용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인 부트스트래핑(bootstrapping) 전략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부트스트래핑이란 영어 속담 “to pull oneself up by one’s bootstraps(스스로 부츠 끈을 잡아당겨 자신을 끌어올리다)”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부트스트랩(bootstraps)은 부츠를 신을 때 잡아당기는 가죽끈으로, 남의 도움 없이 자기 힘만으로 무언가 시작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를 스타트업에 대입해 벤처캐피탈(VC) 등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초기 자본금과 매출 창출을 기반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하지만 부트스트래핑은 창업자의 자율성 확보, 지분 희석 방어,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등의 장점이 있는 반면, 성장이 제1의 미덕인 스타트업에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자금 부족으로 인한 성장 둔화’라는 단점이 있었다. 최근에는 이를 보완하고자 ‘시드스트래핑 (seed-strapping)’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부상하고 있다.
시드스트래핑은 부트스트래핑과 VC 투자를 절충한 개념이다. 창업초기 소규모 시드 라운드 (VC, 액셀러레이터 등)를 통해 자금을 확보한 뒤, 이후 추가 투자 없이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전략을 말한다.
즉, 부트스트래핑의 자립성과 VC 투자의 초기 자금력을 결합한 방식으로, 한 번의 시드 투자 이후에는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매출을 통해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시드스트래핑은 스타트업 자금조달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재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서 시드스트래핑이 주류가 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시드투자’를 해줄 VC가 수긍하기 어려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투자자도 내가 이 기업의 마지막 밸류(Value, 기업가치)를 찍은 투자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VC는 투자한 회사를 IPO나 M&A를 통해서 Exit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성장한 중·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들의 Exit 방식이지, 시드 단계 투자를 하는 VC들에게 IPO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이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IPO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3년으로, VC 펀드 만기인 7~8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VC들은 내가 투자한 기업이 지속적인 투자를 받아 매 투자 라운드마다 밸류를 높여 평가이익을 만들어주고, 펀드 만기 즈음에 IPO까지 못 가더라도 다음 라운드 투자자가 더 높은 밸류로 투자함과 동시에 내 구주도 매입해 줄 수 있는 Exit 창구가 마련되기를 원한다. 이들에게 “이번에 당신에게 받는 투자가 마지막 투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기업은 매력적으로 보이기 어렵다.
또 시장 선점이 중요한 분야의 경우, 대규모 자금의 투입이 필수적이므로 자본 효율성에 집중하는 시드스트래핑은 ‘로켓 성장’이 필요한 비즈니스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SaaS, ICT서비스, 콘텐츠 등 자본집약도가 낮고 빠른 수익화가 가능한 분야에는 적용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하드웨어나 인프라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에는 적용이 어렵기에 벤처 업계의 주류 투자방식으로 자리잡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투자자들이 시드스트래핑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벤처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많은 스타트업들이 ‘흑자 전환’을 강조하는 언론 보도를 내고 있다. 이는 비용 절감, 사업 모델의 재정비 등을 통해 수익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이런 기사를 보면 “투자금이 쌓여 있을 때는 적자를 감수해야만 하고, 자금이 마르자 흑자를 내는 전략이 과연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성장성을 포기하며 지속가능성을 추구한 결과일 것이나, 한편으로 기존과 같은 과도한 투자가 경영진의 위기의식을 흐리고 방만한 자금 사용을 조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르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통제하는데 시스드트래핑은 도움이 된다. 꼭 필요한 자금만 투자를 받고 빠르게 매출로 자생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방식이므로 타이트한 투자금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노코드 툴 등 기술의 발달로 적은 인력과 자본으로도 MVP 개발, 마케팅 운영이 가능해지면서 SaaS, ICT서비스 등 일부 분야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자본력 싸움이 아닌, 효율적 운영이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점도 시드스트래핑의 성장에 긍정적 요소다.
앞서 언급된 시드 투자하는 VC들이 Exit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해소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드라운드 한번만이 아닌 2~3번의 투자라운드를 설정하고, 각 라운드마다 꼭 필요한 금액만 조달하는 방식으로 설계해 초기 VC들이 Exit 할 수 있는 구조를 보완한다면 충분히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이미 Zapier, StackCommerce 등의 스타트업이 한 번의 시드 투자 후 추가 투자 없이 큰 성장을 이루고, Exit까지 만들어낸 사례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VC들 또한 “후속 투자가 없는 구조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시드스트래핑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자본 효율성과 장기적 파트너십, 그리고 새로운 투자회수 모델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 유지윤 팀장은 현재 벤처투자회사(VC)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투자심사역으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글로벌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LG상사(現 LX인터내셔널) 금융팀과 기획팀을 거쳐, 게임 개발 스타트업 플라이셔에서 사업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커리어를 전환, 현재 기술 기반 초기창업기업 전문 VC인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다수의 벤처투자조합을 운용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