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살 먹은 개와 살고 있다.

첫 만남은 지난 2017년 우연히 아내와 펫샵 앞을 지나다가 이뤄졌다. 개를 좋아하긴 했지만 반려견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쇼윈도 안에 전시된 강아지들을 복잡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펫샵의 아이들은 대개 잠을 자거나 바깥 구경꾼에게 격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뒷발로 콩콩 뛰면서 오두방정을 떠는 아이들 틈에서 유독 점잖은 녀석이 시선을 빼앗았다.

‘비숑프리제 / 수컷 / 5개월’ 이라고 적힌 우리 안에서 녀석은 네 발로 선 채 손을 흔드는 나를 따라 시선만 점잖게 옮겼다. 고개도 움직이지도 않았고 들뜨거나 안쓰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발아래 깔린 배변 패드에서도 자신의 작디 작은 대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채 꼬리도 흔들지 않으며 놈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오히려 내가 폴짝 뛰고 난리를 피우며 녀석의 시선을 끌었다.

그렇게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사람 같은 강아지’와 ‘강아지 같은 사람’이 서로를 한참 바라봤다.

그날 밤 나와 아내는 새벽까지 머리에서 그 작은 놈을 떼어내지 못했고 다음 날 펫샵으로 달려가 결국 녀석을 데려왔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나의 바람과는 거리가 먼 ‘모찌’라는 지나치게 말랑한 이름을 지어줬다.

모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위엄을 갖춘 존재’였다. 산책 중 자신보다 덩치가 10배는 될 법한 개가 다가와도 결코 꼬리를 내리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나와 아내 쪽으로 누군가 다가오면 앙칼지게 짖었으며 반려견 카페처럼 다른 개들이 많은 공간을 방문해도 낯설거나 공포에 떠는 대신 한갓진 귀퉁이에 먼저 자리를 잡고 차분히 나를 기다렸다.

다른 개들이 보이는 관심에는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예민하지 않았고 흥미를 끄는 친구를 만나도 졸졸 따라다니지 않았다. 아내는 모찌의 사회성을 걱정했지만 나는 녀석의 위엄을 지키는 품행이 뿌듯했다.

수명의 절반 정도를 채운 지금의 모찌를 가만히 보며 녀석이 살아가는 기본적 태도를 생각한다. 어쩌면 모찌가 지닌 위엄의 근원은 ‘네가 나를 함부로 대하더라도 나는 너를 귀하게 여기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퇴근한 주인을 온몸으로 반기는 모습은 개와 함께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아는 행복이다.

그러나 모찌를 관찰하면서 놈에게는 내게 없는 ‘신의’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떤 개에게 ‘신의’란 태어나면서부터 탑재된 존재의 목적처럼 상황과 조건보다 앞서 발휘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인간이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사랑만 주는 순간에도 개는 자신의 사랑을 뿜어내 보여줘야 하는 과제를 지닌 것 아닐까.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을 득실로 구분하는 내가 그 하해와 같은 마음 앞에서 넘지 못할 위엄을 느끼는 것 아닐까.

<타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사회라면 도덕성이란 결국 거기에 속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계산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이 ‘계산’이라는 것이야말로 영장류의 전문 분야다. 우리 영장류는 계략을 짜고, 음모를 꾸미고 확률을 따진다. 그러면서 상대를 이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이해득실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줬는가?” “너는 나를 보완해 주는가?”

우리 영량류에게는 계약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산이야말로 계약의 본질이자 영장류의 본질이다.(중략)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개를 사랑하는가? 개들이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깊은 구덩이를 파냈기 때문이다. 그 구덩이 속에는 영장류가 되기 이전의 우리가 살고 있다.

영장류가 되기 전의 우리는 행복이 결코 계산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먼저 신의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하는 것이며 계산과 계약은 항상 그 다음이다.>

『철학자와 늑대』(2013) / 마크 롤랜즈 / 추수밭

고작 작은 개 한 마리를 키우면서 동물이 주는 행복감에 대해 낭만에 찬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일반적인 생활을 하며 느끼는 스트레스나 버거움이나 현타를 개에게서 받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집 개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감정의 동화 때문이다.

개는 내게 원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내 기분에 완전히 지배받기를 먼저 선택한다. 내가 웃으면 개도 웃고 내가 힘들면 개도 힘들다. 스트레스 없는 관계의 필요충분조건은 상대방 마음속 온도에 맞게 데워지거나 식어갈 준비가 된, 말하자면 ‘개 같은 천진함’이다.

다만 수련이 부족한 내가 개처럼 살 수는 없다. 모찌에게 어지간한 사랑을 주고 녀석에게서 무조건적 사랑을 받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