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로부터 시작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인류가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AI는 이제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며 삶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돌이켜보면, 바둑과 AI의 만남은 단순한 기술 발전의 상징을 넘어 인간 사회의 집단적 상상력을 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수천 년 동안 인간 두뇌와 직관의 전유물이었던 바둑이 알고리즘에 의해 정복당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게임의 패자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론적 도전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간 연재된 칼럼은 알파고 쇼크에서 출발해 AI의 확장과 AGI의 가능성을 따라가며 인간과 AI의 공존을 묻는 여정이었다. 이제 질문은 “AI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서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바뀌었다.
#13. AI는 이제 일상이자 환경이다
올해 초 열린 세계 최대 기술 박람회는 생활 속 AI 혁신의 전시장이었다. AI 관련 제품이 전년보다 50% 이상 증가했고, 헬스케어, 모빌리티,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에서 AI가 핵심동력임을 보여줬다. 특히 생활가전의 경우, 사용자의 세탁 습관을 학습해 최적의 코스를 제안하는 세탁기, 집 구조를 3D로 학습하고 반려동물 배설물까지 감지하는 차세대 로봇청소기, 내부 식재료를 인식해 유통기한을 관리하고 레시피를 추천하는 AI 냉장고 등이 선을 보였다. 스마트홈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가 되었다. 편리함이 커진 만큼 데이터 활용과 프라이버시라는 숙제도 남았지만, 일상 속 혁신은 가히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올 1월 7~10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 2025’에 참가해 인공지능(AI) 메모리 기술력을 선보였다. (사진=SK하이닉스)
과거에는 인공지능을 경쟁자나 단순한 도구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AI는 이미 경쟁의 단계를 넘어선 ‘환경’ 그 자체가 되어 있다. 검색, 추천, 번역, 창작은 물론 중요한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AI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영역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인간은 AI를 ‘이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단계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가 것인가’를 고민하는 국면을 맞았다.
언젠가부터 바둑기사들은 AI와의 경쟁이 아니라 ‘적극적 협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과거 사제지간으로 전해지던 일련의 기도(棋道)가 이제는 AI 학습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정석이 승률 기준으로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며, 바둑의 ‘감각’이라는 전통적 요소마저 통계와 알고리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바둑계는 AI를 단순한 도구나 상대가 아닌 또 다른 두뇌로 받아들이며 인간과 AI의 하이브리드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14. 인간 고유의 영역은 어디인가
AI가 바둑에서 인간을 넘어선 지 오래지만, 여전히 바둑팬들은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두고 감탄하며, 수읽기와 심리전에서 즐거움을 만끽한다. 인간의 실수, 감정과 집념이 스며 있는 승부는 여전히 감동적인 스토리가 된다. 기술적 완벽성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바둑은 AI에 의해 재편되었지만, 인간만이 바둑에 이야기를 입히고 감정을 더할 수 있다. 예술, 문학, 철학 또한 마찬가지다. 생성형 AI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만, 독자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와 울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 중요한 가치인가’라는 본질이다.
AI 혁명은 현실이 되었다. AI는 소멸의 기술이 아니라, 생성의 기술이다. AI는 산업과 경제의 구조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업무가 대체되면서 사회는 ‘AI로 대체될 직업’이라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욱 창의적이고 고도화된 업무, 그리고 관계 중심적인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문제는 AI의 발달이나 확장이 아니라, 이를 다루는 인간이다. 맥락을 이해하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윤리적 판단력을 갖춘다면 인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연재한 칼럼은 AI와 바둑의 만남에서 시작해 인간과 기술의 공존을 탐색하는 여정이었다. 이제 새 장(章)은 더 넓은 지평을 바라본다. AI는 더 이상 맞서야 할 ‘상대’가 아닌, 피할 수 없는 ‘환경’이다. 이 거대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낼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할 것인가? 답은 아직 열려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자만이 다가올 시대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알파고가 던진 한 수(手)는 바둑판을 넘어, 우리의 일상까지 파고들었다. AI와 함께하는 일상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일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