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회 영상회의록시스템 캡처
“사건의 파장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순차적 분리감사로 동시감사, 특별감사를 늦춘 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조직보호 본능 이런 것들이 작동한 듯하다. 이 정도 부당대출 사고가 발생했으면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특별감사를 진행했어야 했다.”
지난달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IBK기업은행의 부당대출 사고와 관련해 지적한 발언입니다. 이 의원은 86세대 운동권 정치인의 대표 주자이나 어느덧 5선의 관록이 쌓여 현재는 차분하고 점잖은 질의로 정평이 난 인물입니다. 그런 이 의원이 지난달 20일 국정감사에서 기업은행장에게 호통을 치며 잘못을 추궁합니다. 이어 종합감사에서도 별도의 시간을 내 강한 어조로 질타합니다. ‘순한맛’ 의원에게서 보기 드물게 ‘매운맛’ 질의가 나온 건데요. 그 여파로 김성태 기업은행장이 곤혹스러움에 쩔쩔매는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기업은행의 부당대출 사고는 올해 1월 자체 공시를 통해 처음 알려졌습니다. 사고발생 기간은 2022년 6월부터 2024년 11월까지 약 2년 5개월, 사고금액은 240억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약 두 달 뒤 발표한 내용은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2017년 6월부터 2024년 7월까지 약 7년 동안 총 882억원의 부당대출이 발생했다고 밝혔습니다. 기간도, 금액도 3배 안팎 불어난 겁니다. 금감원 발표에 따르면 기업은행 퇴직 직원이 부동산업체를 차려 기업은행에 재직 중인 배우자, 입행 동기 등의 도움을 받아 대규모 부당대출을 일으킨 ‘질 나쁜’ 금융사고였습니다.
이번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기업은행은 지난해 8월 제보를 통해 최고 사고를 인지했습니다. 9~10월 자체 조사를 진행해 여러 지점이 연루된 사실을 파악했고, 11월 정기감사를 거쳐 12월 금감원에 사고를 보고했습니다.
이 의원은 이 과정에서 기업은행의 조직보호 본능이 발동돼 사건이 축소·은폐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특별감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순차적인 분리감사를 통해 혐의자들이 조사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혹입니다.
기업은행은 사건을 축소·은폐할 의도가 없었고, 검찰이 수사를 진행 중이어서 의원실 자료 제출에 애로가 있었다고 항변했지만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금감원 검사 과정에서 담당 부서장의 지시로 사건 관련 파일 271개가 삭제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석연치 않은 정황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내막은 향후 수사 등을 통해 명확히 밝혀지겠으나 집권 여당의 5선 의원이 ‘축소·은폐’, ‘조직보호’의 시각으로 해당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기업은행으로선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 시점이 최고경영자 교체 시기여서 더 그렇습니다.
김성태 행장의 임기는 내년 1월 2일까지입니다. 임기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4대 금융지주였다면 금융당국의 ‘지배구조 모범관행’에 따라 벌써 경영승계 절차가 진행됐겠지만 기업은행은 정부가 대주주인 국책은행이어서 CEO 선임 절차가 다릅니다. 금융위원장이 최종 후보자를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입니다. 금융위원장은 독단적으로 후보자를 결정하지 않고 대통령실, 여야, 금융권 등 여러 업무 파트너들과 협의 후 선정합니다.
과거에는 정부 관료 출신이 기업은행장 자리를 꿰차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졌으나 2010년 조준희 행장(23대) 이후로는 내부 승진이 오히려 상식이 됐습니다. 24대 권선주, 25대 김도진, 27대 김성태 행장이 모두 내부 출신입니다.
이런 배경을 감안하면 차기 28대 행장도 내부 출신일 가능성이 높지만 돌발 변수가 생겼습니다. 1000억원에 가까운 부당대출이 7년 동안이나 진행됐음에도 내부 시스템으로는 전혀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외부 제보를 통해 겨우 조사가 진행됐지만 이마저도 ‘은폐·축소’ 의혹이 제기된 상태입니다. 더욱이 가장 적극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이는 야당이 아닌, 여당의 5선 의원입니다. 국감 현장에서 김성태 행장은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감원장이 보는 앞에서 시원스레 의혹을 해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뭔가 숨기는 듯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대통령실과 여당에서 ‘이번에는 상황이 특별해 보이니 은행장을 외부 인사로 하자’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는 형국입니다.
다만, 기업은행 입장에선 외부인사를 막기 위한 보험계약(?)이 존재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입니다. 기업은행 노조는 지난달 30일 성명서를 통해 “우리가 요구하는 행장의 최우선 자질은 현 대통령과 여당이 기업은행 노조와 체결한 합의를 지킬 의지와 능력”이란 입장을 내놨습니다. 노조는 지난 5월 8일 이재명 대선 캠프의 책임자였던 박찬대 상임총괄선대위원장 명의로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상장형 공공기관의 특수성 인정 내용과 함께 “자질 부족 낙하산 행장을 근절하고 투명하게 임명한다”는 문구를 상기시켰습니다.
최근 5명의 행장 중 유일한 외부 인사인 윤종원 행장은 더불어민주당 집권기인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됐습니다. 공교롭게도 ‘내부승진 대세론’은 또 민주당 집권기에 위태로와졌습니다. 기업은행은 과연 제28대 행장을 내부 인사로 맞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