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29일 ‘우리금융 미래동반성장 프로젝트 CEO 합동 브리핑’에서 생산적 금융 73조원, 포용금융 7조원의 추진방안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우리금융그룹)


바둑으로 치면 ‘결정적 승부수’로 보입니다.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9일 정부가 추진하는 국민성장펀드에 10조원 참여 계획을 밝혔습니다. 국민성장펀드는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 전략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정부와 민간이 150조원 규모로 조성하는 정책금융펀드입니다. 향후 5년간 정부와 민간에서 각각 75조원씩 모집할 계획인데 민간에선 처음으로 우리금융이 발 빠르게 10조원 참여 계획을 밝힌 것입니다. 이는 전체 자금의 13.3% 규모입니다.

국내 4대 금융지주 중 4위로 평가받는 우리금융이 무려 10조원 참여 계획을 밝히면서 다른 금융지주들의 셈법이 복잡해졌습니다. 4등이 10조원을 한다는데 1~3등이 그에 못미치는 금액을 발표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집니다. ‘리딩금융’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 중인 KB금융이나 신한금융도, 확실히 우리금융을 제쳤다고 생각하는 하나금융도 최소 10조원 이상은 언급해야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특수은행으로 분류되긴 하나 농협금융 역시 우리금융과 몸집이 비슷해 그 언저리는 감당해 줘야 당국의 눈총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5대 금융지주에서만 50조원 이상의 자금 모집이 가능합니다. 75조원의 66.7%입니다. 1~3등이 덩치에 걸맞게 1조~2조원이라도 더 태우겠다고 덤비면 60조원(80%)도 기대해 볼만 합니다. 은행권에는 지방은행과 기업은행도 있고 타 업권(보험, 증권, 자산운용, 연기금 등)에서도 참여 예정이니 75조원을 채우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국민성장펀드를 총괄하는 금융당국 입장에선 흥행 여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큰 근심을 덜게 됐습니다.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생산적 영역으로 돌리려 하는 이재명 정부에 큰 힘이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금융은 10조원이라는 선을 하나 그었을 뿐인데 금융권 전체에 큰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문득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국제통화기금)가 ‘BIS비율 8%’ 기준을 제시하면서 은행들이 생사 기로에 놓였던 때가 떠오릅니다. 체계적인 질서를 잡으려면 학교 운동장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준을 잘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금융위원회의 권대영 부위원장은 ‘생산적 금융’을 위해 150조원이라는 목표금액을 제시했고, 우리금융 임종룡 회장은 그 안에서 다시 10조원이라는 기준선을 그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럽게 민간 부문 75조원의 얼개가 완성됩니다. 관료 후배인 권 부위원장이 ‘아’ 하니 선배인 임 회장이 ‘어’ 하고 부응하는 모양새입니다.

사실 금융위원장 출신인 임종룡 회장에게 75조원 분담표 작성은 ‘식은 죽 먹기’일 수 있습니다. 정책금융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꿰뚫고 있는 임 회장은 과거 정부에서 관제 펀드를 조성한 경험이 많습니다.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이 무엇을 원하고, 정부 관료가 이를 어떻게 서포트할 수 있는지 매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100조원을 얘기할 때 담당 관료가 150조원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는 배경과 고충도 잘 압니다. 새 정부의 배드뱅크 설립 출연금 4000억원을 두고도 서로 적게 내려 기싸움이 치열한 것이 금융권 속사정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선배 관료가 민간 은행지주 회장이 돼 75조원 난제의 물꼬를 터주니 후배 관료로서는 얼마나 감읍한 일일까요.

물론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임 회장 또한 이번 승부수로 상당한 수혜를 입을 것 같습니다. 임 회장의 연임 도전에 대해 적어도 정부와 여당에서 딴지를 걸 확률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혹여 실력자 누군가가 딴지를 걸더라도 반박할 확실한 명분이 생겼습니다. 정권의 명운이 걸린 생산적 금융을 위해,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CEO를 어떻게 홀대할 수 있겠느냐고.

윤석열 정부에서 터무니없는 박해를 경험한 이사회 또한 고민의 깊이가 얕아졌습니다. 정권의 무도한 외압을 방어하는 데 있어 관료 세계의 보이지 않는 엄호가 얼마나 중요한 지 이전 정부에서 충분히 체득했습니다. 임 회장이 이끄는 현 경영진은 그룹의 미래가 걸린 동양·ABL생명 인수합병을 지켜냈고, 이재명 정부에서 그룹이 나아가야 할 청사진 또한 제시한 상태입니다. 임 회장 경쟁자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아내기 쉽지 않은 형국입니다.

임 회장은 ‘우리금융 미래동반성장 프로젝트 CEO 합동 브리핑’이라고 명명한 행사장에서 계열사 CEO 6명과 함께 국민성장펀드 10조원 참여를 포함, 향후 5년간 총 73조원을 ‘생산적 금융’에 쏟아붓겠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6월말 기준 은행별 기업대출 규모는 KB국민은행 185조원, 신한은행 175조원, 하나은행 166조원, 우리은행 150조원, NH농협은행 147조원입니다. 은행 의존도가 절대적인 우리금융 현실을 감안할 때 지금 계획한 생산적 금융이 현실화되면 5년 뒤 우리은행의 기업대출은 200조원을 돌파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업금융에 강한 은행이라지만 단기간에 그만한 수요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경쟁 은행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우량 알짜 기업들이 대한민국에 그렇게 많이 있을까요. 어차피 3년 후면 CEO가 바뀔 테고, 5년 후면 대통령도 바뀔 테니 73조원은 그저 ‘선언적 수사’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5년 뒤 금융당국이 실적을 확인할 리도 없겠지만, 설사 확인한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했는데 수요가 없더라”라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지금 기업들이 과연 자금이 부족해서 투자를 못(안) 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돈 벌 자신이 없어서 못(안) 하고 있는 걸까요. 국내 대표 기업들의 천문학적 사내 유보금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걸 감안하면 후자가 현실에 가까운 상황 인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멀쩡한 기업일수록 은행 융자보다는 직접 자금조달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대내외 환경을 무시하고 금융권이 목표 숫자에 집착하면 결국 기업들은 눈먼 돈을 탐하게 되고 산업에는 거품이 끼게 마련입니다. 이는 결국 금융권에 부실채권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국민성장펀드로 축소시켜 봐도 걱정거리는 많습니다. 제 기억에 나라에서 만든 펀드가 성공한 사례는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펀드, 박근혜 정부의 통일펀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 하나 같이 시작은 창대했지만 끝은 미미했습니다. 당장 오늘자 뉴스만 봐도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와 윤석열 정부의 혁신성장펀드 총액 21조원 중 실제 투자액은 10조원에 그쳤다고 합니다. 조성액의 절반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150조원 펀드를 들고 나오는 게 현실입니다.

AI를 위해선 칩과 전력이 필요하니 막대한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AI가 발전할수록 일자리는 줄어들텐데 여기에 대해 정부는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큰 희생을 치르고 그나마 AI 경쟁력이 확보되면 다행이겠지만 그 또한 불투명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AI 시장과 전략을 두고 국가적으로 제대로 된 비전 공유나 합의 도출 노력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을 특정 인물, 특정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 모든 우려를 뒤로한 채 정부는 150조원을, 우리금융은 10조원을 일단 질렀습니다. 뭐, 어차피 운칠기삼. 언제나처럼 국운이 따라 이번 도박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임 회장 개인은 이번 승부수를 통해 성공에 근접한 것 같습니다.

자료=우리금융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