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1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재명 대통령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12.19(사진=연합뉴스)
“지난번 BNK 관련해서 질의하고 나서 난리가 났어요. 부산·경남 지역에서 어마어마한 문자와 격려, 더 질의해 달라…….”
지난 10월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 국정감사 자리에서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에게 질의에 앞서 한 발언입니다. BNK금융그룹 경영승계와 관련해 절차적 정당성을 문제 삼았더니 부산·경남 지역에서 어마어마한 응원 문자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박 의원이 문제 삼은 ‘절차적 정당성’ 관련 질의는 그 간의 상황(제도)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는 질의였습니다.(관련 기사 : 금감원장이 불쑥 던진 ‘참호 구축론’…금융지주는 ‘억울하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났으면 삼가고 자중해야 할 텐데 박 의원은 오히려 ‘어마어마한 격려 문자를 받았다’며 잔뜩 상기돼 오류 있는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대전 서구가 지역구인 충청도 4선 의원이 왜 부산·경남의 민감한 민원성 이슈에 선뜻 팔 걷고 나섰는지 짐작을 못 할 바는 아닙니다. 이른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BNK금융이 대출을 실행한 것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권력형 유착’ 의혹을 제기해 왔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여당 정치인들에게 빈대인 BNK금융 회장은 ‘윤석열 사람’이므로 제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내년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부산·경남의 승리가 중요하니 부산은 더 이상 부산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구 문제로 부상한 것이지요.
그렇더라도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박범계 의원은 국회 상임위 중 법제사법위원회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펼쳐왔고 정무위원회는 올해가 처음입니다. 2023년 12월 금융감독원이 ‘은행지주·은행의 지배구조에 관한 모범관행’을 발표한 후 2년 가까이 현장 착근을 위해 노력해 온 점을 모르고 질의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질의로, 정확히 문제를 짚어야 피감기관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습니다. 부산의 여당 지지자들이 어마어마한 응원 문자를 보낸다고 희희낙락할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찬진 원장 또한 질문의 오류를 짚어내지 못했으면 뒤늦게라도 본인의 답변을 다시 살펴봐야 했지만 구두 지도, 현장 조사 운운하며 박 의원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현장의 변화를 모른 채 뇌리 속 박힌 고정관념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원장이 답변한 ‘참호 구축론’은 금감원의 ‘지배구조 모범관행’이 발표되기 훨씬 전 시대, 그러니까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 등에나 어울릴 법한 답변이었습니다. 양종희 KB금융 회장,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이찬우 농협금융 회장 등 현 5대 금융지주 회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얘기입니다.
혹여 ‘지배구조 모범관행’이 윤석열 정부 시절 만들어진 것이어서 못마땅한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금감원뿐만 아니라 은행연합회, 8개 은행지주, 5개 은행, 연구기관 등이 TF를 구성해 10여 차례 넘는 회의를 거쳐 마련된 안입니다. 해외 사례를 꼼꼼히 비교·분석한 뒤 사외이사 지원조직 및 체계, CEO 선임 및 경영승계절차, 이사회 구성의 집합적 정합성 및 독립성 확보, 이사회 및 사외이사 평가체계 등 4개 분야의 30개 핵심원칙이 도출됐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크게 흠잡을 데 없는 글로벌 표준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해 하루아침에 모범관행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웠습니다. 이에 은행계 금융지주들은 지난해와 올해 2년 동안 당국과 소통하며 차근차근 하나씩 제도 개선을 수행해 왔습니다. 모범관행을 따르면서도 저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정관과 내부 규범, 이사회 규정을 손보는 데 상당한 시간과 공을 들였습니다. 당국 또한 금융지주 CEO뿐만 아니라 사외이사들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보고 이사회와 정기적으로 소통하며 변화 노력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올 상반기 하나금융그룹이 처음으로 ‘모범관행’에 입각해 경영승계를 진행했고, 하반기에는 신한금융, 우리금융, BNK금융이 관련 절차를 진행해 왔습니다.
현 금융지주들이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BNK금융의 경우 이사회 구성 등 여러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지난 2년의 준비와 노력을 깃털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법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제도이고, 당국과 업계가 상호 소통하며 열심히 준비해 온 제도라면 설사 부족함이 보이더라도 수정하고 보완하며 격려하는 것이 상식에 가까운 대응 방식입니다.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있지 않아서 금융지주 저마다의 모범관행이 정착되려면 오랜 시간 시행착오가 불가피합니다.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눈엣가시 같은 이가 빈틈을 보이니 이때다 싶어 ‘부패한 이너서클’로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관치금융을 넘어 정치금융의 의심을 자초하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과거 KB금융과 신한금융, 우리금융에서 있었던 것처럼 투서가 넘쳐나고 갈등이 더 깊어져 문제가 악순환될 공산이 큽니다.(관련 기사 : 대통령 ‘이너 서클’ 발언, 금융지주 미칠 파장은)
지배구조와 관련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은 ‘정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금융당국이 제시한 해결책도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모범관행’입니다. 뭐라고 딱 정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때는 맞았어도 지금은 틀렸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때는 틀렸어도 지금은 또 맞을 수 있습니다.
현재는 부패한 이너서클이 화두이지만 10년, 20년 장기 집권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KB금융은 윤종규 회장의 장기 집권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고 리딩금융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업계의 지배적인 평가입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 등 해외에서도 10년, 20년 장기 집권하는 CEO들은 많습니다. 경영자의 역량과 무관하게 때때마다 CEO를 갈아치우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습니다. 사외이사 권한 강화 또한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10여년 전 KB금융에서는 CEO보다 사외이사 파워가 셌습니다. 권한-책임 불일치의 사외이사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막장 이사회’가 연출됐습니다. KB금융 사례 하나만 놓고 봐도 ‘정답이 이거다’ 제시하기 어렵다는 점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 은행지주 지배구조에 흠결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사회 구성의 집합적 정합성 및 독립성 확보 부문에서 여러 가지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금융당국이 ‘정답’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당국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관리자이자 조정자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윤종규(KB)·조용병(신한)·손태승(우리)·김태오(대구) 회장을 퇴진시켰던 윤석열 정부와 달리 이재명 정부는 금융지주 인사에 간섭하지 않아 친시장 정권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이런 인식이 정권 말까지 흔들림 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