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윤 HDC현대산업개발 본부장이 지난 16일 서울 용산 사옥에서 인터뷰를 갖고 '짓고 떠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설업의 미래 생존 전략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손기호 기자)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의 여진과 미분양 사태, 그리고 심화되는 인구 절벽. 2026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건설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현장에서는 이제 아파트로 돈 벌던 시대는 끝났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박희윤 HDC현대산업개발 개발본부장은 지금의 위기를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진통이라고 봤다.

박 본부장은 일본의 대표적인 디벨로퍼 모리빌딩의 서울지사장 출신이다. 도쿄의 롯폰기힐스를 탄생시킨 모리빌딩의 철학과 노하우를 내부에서 깊이 있게 경험한 도시기획가다. 그가 현장에 복귀해 지휘하고 있는 광운대역세권 개발사업(서울원)과 용산 프로젝트는 건물을 짓는 공사에 머물지 않는다. 도시에 소프트웨어를 심는 작업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짓고 떠나는 방식으론 발전 가능성이 없음을 강조했다. 디벨로퍼가 도시에 남아 직접 운영하고, 사람들을 모으고, 활력을 불어넣는 타운 매니지먼트만이 소멸해가는 도시를 살릴 유일한 해법이라는 것이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 HDC현대산업개발 사옥에서 그를 만나 도시의 미래를 물었다.

왜 한국엔 롯폰기 힐스가 없었나

Q. 일본과 한국의 개발 현장을 모두 깊이 경험했다. 한국 도시개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체력과 숙의의 부재다. 일본은 미쓰이, 미쓰비시 같은 지역 기반의 메이저 디벨로퍼들이 100년 넘게 성장해 왔다. 그들은 건물을 짓고 분양해서 수익을 내고 떠나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며 자산 가치를 높인다. 그러니 긴 호흡으로 도시를 기획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2000년대 초반, 당시 서울시 부시장님이 일본을 시찰하고 와서 우리도 일본처럼 '착한 디벨로퍼'를 양성하자는 모임을 만들었다. 제가 그때 쓴소리를 했다. 그건 '착한' 게 아니라 '체력이 있는 것'이라고. 롯폰기힐스는 완성까지 17년이 걸렸다. 모리빌딩은 그 시간을 버틸 체력과 철학이 있었기에 걸작을 만든 것이다.

한국은 금융 규제나 사회적 인식 탓에 대기업이 부동산을 오래 보유하는 걸 죄악시했다. 그러니 건설사들은 빨리 짓고 빨리 파는 속도전에만 목을 맸다. 도시를 깊이 있게 고민할 숙의의 시간이 생략된 채 아파트만 찍어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Q. 그래서 분양이 아닌 운영을 강조하는 것인가.

그렇다. 분양하고 떠나버리면 그 동네가 슬럼화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디벨로퍼가 그 타운을 직접 보유하고 운영한다고 가정해 보자. 임대료를 계속 잘 받으려면 동네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디벨로퍼가 나서서 벚꽃 축제도 열고, 여름엔 비어 가든도 만들고, 겨울엔 크리스마스 마켓을 유치한다.

일본 롯폰기힐스에서는 여름 축제를 위해 독일 대사관, 남미 대사관과 협업한다. 그러면 주변 식당들이 그 시즌에 맞춰 남미 음식 메뉴를 내놓는다. 이런 디테일한 타운 매니지먼트가 모여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된다. 동네 상권을 살리고 지역 가치를 올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이에스지(ESG) 경영이다.

광운대역 서울원과 용산의 큰 그림

Q. 현재 총괄하고 있는 광운대역세권 개발, 서울원은 어떤 공간이 되나.

단순한 베드타운이 아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경춘선의 시발점이었다. 과거 서울 시민들에게 경춘선은 무엇이었나.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촌으로, 춘천으로 떠나는 낭만과 휴식의 통로였다. 우리는 그 맥락을 잇고 싶다.

지금 서울의 라이프스타일은 강남 대치동 학원가로 대표되는 경쟁과 속도에 지쳐 있다. 서울원은 강남과는 다른, 강북만의 여유와 낭만이 흐르는 거점이 될 것이다. 인근 고려대, 경희대, 카이스트 등 우수한 대학 자원과 연계해 청년들이 창업하고 일하며 사는 직주락 융합 도시를 만들 것이다. HDC현대산업개발 본사도 이곳으로 옮긴다.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끝까지 책임지고 이 타운을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Q. 용산 개발도 관심사다. 용산을 한국판 롯폰기힐스로 만들 구상인가.

물론이다. 용산은 서울의 얼굴이자 글로벌 허브다. 이미 하이브, 아모레퍼시픽, LG유플러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둥지를 틀었다. 제가 생각하는 용산 활성화의 핵심 열쇠는 뜻밖에도 호텔이다.

한국 사람들은 호텔을 그저 여행 가서 잠자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도시 기획 관점에서 호텔은 커뮤니티의 중심이자 지역의 격을 결정하는 앵커 시설이다. 한남동이 왜 부촌이 되었나? 그랜드 하얏트라는 훌륭한 커뮤니티 센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산에 최상급 호텔을 유치하려는 이유는 단순 숙박업이 아니다. 전 세계 비즈니스맨들이 그 호텔 라운지에 모여 대화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혁신이 일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기업, 주거, 문화가 호텔을 중심으로 섞이는 곳, 그게 제가 그리는 용산이다.

을지로와 세운상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Q. 을지로, 세운상가 등 구도심 재개발 논쟁 뜨겁다. 보존,개발 사이 길을 잃은 느낌이다.

높이 규제나 보존 논리에만 매몰돼 있는 게 안타깝다. 일본 니혼바시의 사례를 꼭 참고했으면 한다. 니혼바시는 에도 시대 때 어시장과 약재상이 있던 거리였다. 이 지역을 재개발할 때 일본은 옛날 건물을 그대로 두자는 식의 박제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 지역의 유전자를 계승했다.

에도 시대의 약재상 역사는 현대의 라이프 사이언스(제약·바이오) 산업 유치로 연결했고, 어시장의 역사는 푸드 테크 산업으로, 물류의 중심지였던 역사는 우주 모빌리티 산업으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산업 디벨로퍼의 관점이다. 을지로나 세운지구도 마찬가지다. 낡은 공구상을 그대로 두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곳의 제조 기반을 미래의 로봇, 인공지능, 창작 산업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그 미래상을 먼저 그리는 게 순서다.

기업도시 해법? 아파트 키즈는 성수동을 원한다

Q. 군산은 GM이 철수하면서 위기를 겪었다. 기업 떠난 도시 어떻게 활력 되찾을까.

많은 분이 관광을 대안으로 꼽지만,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만으로는 도시가 살 수 없다. 군산에는 영화시장 같은 역사적 장소가 있고, 최근엔 군주라는 지역 특화 술을 만드는 청년들도 생겼다. 이게 중요하다.

도시가 살아나려면 낮에 일만 하고 빠져나가는 곳이 아니라, 밤에도 머무르는 애프터 파이브(오후 5시 퇴근 후)의 삶이 있어야 한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숙박까지 이어지는 다운타운의 밤 문화가 핵심이다. 군산의 매력적인 원도심에 밤에도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머물며 즐길 거리가 생긴다면 기업 유치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기업이 떠났다고 탄식만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다운타운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Q. 용인,이천에 반도체 단지가 들어서지만, 주변 정주 여건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게 바로 한국형 기업 도시의 맹점이다. 왜 요즘 2030 세대가 성수동이나 연남동에 열광하는지 아는가?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에서 자란 아파트 키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편리한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을 좋아했지만, 아파트와 쇼핑몰만 보고 자란 엠제트(MZ)세대에게 그런 공간은 너무나 지루하고 뻔하다. 그래서 골목이 있고, 다양성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성수동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용인, 이천에 공장 짓고 옆에 똑같은 아파트와 쇼핑몰만 지어주면 젊은 엔지니어들이 거기 살겠나? 주말이면 다 서울로 도망간다. 제가 동탄 신도시에서 기획했던 레이크 꼬모 같은 모델이 필요하다. 호수공원과 산책로, 다양한 취향의 상점이 어우러진 라이프스타일 센터와 메인 스트리트를 만들어줘야 한다. 젊은 인재들이 퇴근 후 유모차를 끌고 나오고, 연인과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타운 센터가 있어야 기업 도시도 성공할 수 있다.

지방 소멸 문제는? 부산과 구미, 트윈 시티의 함정을 피하라

Q. 지방 소멸 위기, 건설사 입장에서도 리스크다. 지방 도시가 살아남을 해법이 있나.

지방 도시들이 저지른 가장 뼈아픈 실수가 있다. 원도심을 살리지 않고 외곽에다 뜬금없는 혁신도시를 만든 것이다. 인구는 줄어드는데 도시 기능을 두 개로 쪼개 놓으니, 원도심도 공동화되고 신도시도 활력이 없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이를 트윈 시티 현상이라 한다. 나주 혁신도시나 원주 기업도시가 대표적이지 않나.

일본이나 유럽은 정반대다. 외곽으로 나갔던 시청, 병원, 대학을 다시 도심 한복판으로 불러들이는 콤팩트 시티 전략을 쓴다. 지방일수록 기능을 한곳에 모아야 산다.

Q. 구미나 부산 같은 대도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

구미를 예로 들어보자. 기업 유치한다고 플래카드만 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구미에 온 대기업 직원이 왜 가족을 대구에 두고 혼자 출퇴근하겠나? 구미에서의 삶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대구경북신공항이 들어온다면, 일본의 츠쿠바 익스프레스 사례처럼 공항철도와 연결된 역세권을 고밀도로 개발해, 그 안에서 모든 생활이 해결되는 매력적인 다운타운을 만들어줘야 한다.

부산은 가진 자원이 너무나 훌륭하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내세운 '세븐 비치, 세븐 브릿지' 전략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정말 핵심을 잘 짚었다. 세계 어느 대도시를 가봐도 7개의 해수욕장과 광안대교 같은 7개의 다리를 가진 곳은 없다.

이 천혜의 환경에 대학을 결합해야 한다. 싱가포르가 난양공대를 키워 아시아의 인재를 빨아들이듯이, 부산의 대학들을 특화시켜 스타트업과 해양 레저 산업의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 서울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부산의 바다와 다리를 보며 시민들이 부산에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시빅 프라이드) 도시를 만들어야 청년이 떠나지 않는다. 미국 LA에 갔을 때 현지에 사는 처조카가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이 바로 '더 그로브' 쇼핑몰이었다. 그게 그들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지방 도시에도 그런 앵커 공간이 필요하다.

박희윤 본부장이 지난 16일 인터뷰에서 자신의 저서 '도쿄를 바꾼 빌딩들'에서도 강조한 "건물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을 채우는 '타운 매니지먼트'"라며 이것이 대한민국 도시 개발의 새로운 기준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손기호 기자)

위기의 건설사, 지역의 주인이 돼야

Q. 마지막으로, 생존을 고민하는 건설업계에 조언한다면.

최근 지방의 한 중견 건설사 회장님을 만났다. 서울 재개발 시장에 진출해야 하느냐고 절박하게 물으시더라. 제가 뜯어말렸다. 서울 와서 브랜드 파워 있는 메이저 건설사들과 피 터지게 경쟁하지 마시라고. 대신 지역의 마스터 디벨로퍼가 되라고 조언했다.

대구면 대구, 광주면 광주,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정서를 가장 잘 아는 건 그곳의 토착 기업이다. 단순히 관급 공사 따고 아파트 짓는 시공사에 머물지 말고, 지역의 병원, 학교, 상업시설을 엮어 복합 개발을 하고 운영까지 맡는 종합 디벨로퍼가 돼야 한다. 일본의 지방 건설사들도 다 그렇게 변신해서 살아남았다.

지역을 가장 사랑하고 잘 아는 기업이 만드는 도시는 서울 대기업이 만드는 것과 디테일이 다르다. 그 지역만의 스토리를 입혀라. 그게 지방 건설사가 살길이고, 대한민국 국토의 균형 발전을 이루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