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 여수공장 용성단지 (사진=LG화학)
한때 ‘수출 효자’로 불리던 석유화학 산업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저가 원유를 정제해 합성수지·합성고무 등 고부가 제품으로 전환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글로벌 탈탄소·ESG 기조, 중국 중심의 공급 과잉, 플라스틱 규제 확산이 겹치며 석유화학 산업은 단순한 경쟁력 문제를 넘어 산업의 존재 이유 자체를 되묻는 전환점에 놓였다.
■ 정유와 함께 커온 ‘성장 신화’…이젠 추억으로
정유·화학은 한국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동산 원유를 정제하고 그 부산물을 화학제품으로 승화시켜 고부가가치를 창출했다. 2000년대 이후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SK지오센트릭(舊 SK종합화학) 등은 NCC(납사 분해시설)를 앞세워 합성수지 수출 강국으로 부상했다.
2004년 석유화학 수출은 170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6.7%를 차지했다. 2018년 기준 석유제품·화학제품은 전체 수출의 13.9%에 달했다. 당시엔 “공장을 돌리기만 하면 팔 데가 있다”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 코로나와 함께 시작된 중국발 쇼크… ESG가 흔든 ‘존재의 이유’
2019년 이후 흐름은 바뀌었다. 중국이 대규모 NCC 설비를 자체 건설하면서,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폴리에틸렌·폴리프로필렌 등 범용 수지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에도 중국은 ‘국산화’ 전략을 앞세워 석유화학 설비 투자를 계속 확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수출 의존도 높은 구조 탓에 직격탄을 맞았다. 2023년에는 국내 에틸렌 가동률이 한때 75%까지 떨어졌다. 일부 화학사는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플랜트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셧다운’ 조치까지 단행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위기는 환경에서 왔다. 탈탄소 및 ESG 흐름은 석유화학 산업이 탄생시킨 플라스틱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납사 기반의 탄소 집약적 공정,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 온실가스 배출은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석유화학을 지목하고 있다.
■ 글로벌 환경 규제… “계속 만들어도 되나” 고민
여기에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플라스틱세, 플라스틱 조약 등 다층적인 글로벌 규제가 겹쳐지며, 기존 기술 개선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존립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잘 만들까”보다 “계속 만들어도 되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의 감축 목표 상향은 국내 산업 전반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 특히 석유화학업계는 “공장을 하나 짓는 것조차 부담”이라며 고충을 호소한다. 환경부담금·배출권 거래제도 등도 경영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다. 유럽연합(EU)의 REACH, RoHS, WEEE 지침은 전 세계 환경규제의 표준이 됐으며, 한국은 EU 수출을 위해 이를 사실상 국내법처럼 적용하고 있다.
■ 해법은 녹색화학… 체질 개선 위한 전략적 전환 나서
국제규제는 이제 생산단계부터 제품 폐기까지 ‘전주기적 책임’을 요구한다. 재활용률 기준, 오염자 부담 원칙(PPP), 생산자 책임법(PL법) 등이 확대되며, 제품 설계 단계부터 친환경을 반영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내 주요 정유·화학 대기업들은 기존 화학에서 발을 빼기 위한 전략적 전환(Exit)을 본격화하고 있다. 범용 수지와 기초화학 부문은 매각하거나 분리하고, 대신 바이오·에너지·리사이클링·첨단소재 등 비화학 분야로 확장하는 모습이다. 과거처럼 ‘잘 만들기’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만들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지속가능해야 한다. EXIT의 문턱에서 석유화학 산업은 체질 개선과 생존 전략의 분기점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