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서 말하는 생산가능곡선(Production Possibility Curve)은 경제가 보유한 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를 모두 투입했을 때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GDP를 연결한 다차원 곡선이다. 해당 경제의 기술력과 사회적 인프라, 지정학적 여건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외생변수를 감안한 경제 성과의 최대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정의상 최대치를 뜻하다 보니 대부분의 실물 경제는 이 곡선 안쪽에서 작동하게 된다. 그래서 각 국가의 경제성장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생산가능곡선의 안쪽에서 경계선을 향해 이동하는 형태의 성장, 또 하나는 생산가능곡선 자체의 외연을 넓히는 형태의 성장이다.
첫번째 형태의 성장전략은 성장 잠재력을 구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각종 규제완화나 제도적 걸림돌 제거, 경쟁제한적 독과점 행태 교정, 또는 이와 반대로 인위적 자본 집중과 특혜 공여를 통해 특정 거대산업을 육성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번째 방식은 경제의 잠재력을 높여 성장방정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전략산업에 대한 집중적 R&D, 중소기업 생태계 육성, 고도 기술인력의 양성이나 확보, 고부가가치 외국인투자 유치, 간척사업, 고속도로/철도 건설, FTA를 통한 시장 확장 등 경제의 잠재력을 확대하는 모든 물적, 제도적, 사회적 인프라 구축활동이 이에 해당한다.
두번째 방식의 아류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전략도 있다.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높여 더 많은 부가가치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생산품의 질이 탁월하거나 독점성이 있고, 소비자들의 인지도나 충성도가 충분하다면 시도해 볼 만한 전략이다.
두번째 방식의 대표적 전략으로 해방 이후 우리 정부가 끊임없이 갈구해 왔던 것은 바로 기술혁신을 통한 성장 외연의 확대였다. 우리 경제는 오랜 시간 ‘기술 중심 성장’을 목표로 달려왔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핵심 산업에 막대한 R&D 투자가 이뤄졌고, 스마트팩토리 도입과 산업간 클러스터 형성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애써 왔다.
다만 이러한 노력이 기술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다 해도, 우리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는데는 여전히 제약이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두번째 방식의 아류, 즉 우리 상품에 충분한 부가가치를 요구할 시장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데 당장 우리가 아무리 AI를 비롯한 혁신 기술의 도약을 도모하더라도 우리 경쟁자들 또한 똑같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시장에선 우리 기대에 못 미치는 경쟁적 가격이 매겨질 수밖에 없고, 노력에 비해 의미 있는 외연 확장 성과를 거두기 만만찮다. 대부분 경쟁자에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전략의 일반적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척박한 경쟁 환경에서도 꾸준하게 다른 나라들을 따돌리고 성장을 구가해온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중국, 일본 등 우리와 산업구조가 유사한 제조강국들과의 무한 경쟁은 이러한 전략의 성과를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다고만 하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성장 외연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있다. 너무 오랫동안 여러 차례 논의되고 그럼에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묻혀버린 구닥다리 아이디어, 그런 대안이 하나 있다.
바로 동북아 물류, 에너지망 연계와 대북 경협 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동북아 경제권의 통합이다. 해저터널을 통해 부산과 후쿠오카를 잇고, 북한을 경유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를 활용하면 우리 제품과 서비스는 신속하고 저렴하게 중국, 러시아, EU, 동남아 등 대륙 전체의 소비시장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물류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의 한계, 즉 기존 생산가능곡선 자체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단순한 물류 경로의 혁신만으로도 매년 수십조원의 비용절감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시장 경쟁력도 그만큼 확장될 것이다. 물류비 절감은 잠재적 시장 확대로도 이어질 것이다. 또한 일본의 물류가 한국을 경유하게 되면 중간 패키징, 부품 공급 등 그 경로상에서 창출할 수 있는 우리의 부가가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에너지, 원자재 협력망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연다. 러시아 가스전에서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연결되는 육상 가스관, 한중일 공동의 전력망 구축은 공급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에너지 단가를 낮출 수 있는 획기적인 대안이다. 전력 수요가 큰 첨단산업의 생산비용을 20%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분단의 영향으로 사실상 섬나라 방식의 경제운영을 강요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액화천연가스(LNG)의 몇분의 1 가격에 불과한 파이프라인 천연가스(PNG) 도입의 길이 열린다면 우리 에너지 믹스는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대륙과의 전력망 공유를 통해 몽골과 중국 등지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 기업들의 미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RE100과 CBAM 등 온실가스 관련 무역 규제의 파고를 헤쳐 나갈 중요한 수단을 얻게 된다. 중국과 러시아의 희토류, 리튬 등 천연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또한 글로벌 공급망 교란이 일상화된 지금 우리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된다.
물류망 연계로 동북아 국가간 시장 접근의 기회가 확대된다면 자연스럽게 3대 제조강국간의 산업협력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당장 중국의 밀어내기식 제조굴기는 전 세계를 중국산 철강과 가전, 전기차, 배터리 등으로 포화시키고 있다. 자기 식구와 경쟁국 기업들을 가리지 않고 무한 경쟁에 몰아넣어 단 하나의 생존자가 자국 시장을 독식하고 세계시장을 압도하게 하는 중국식의 굴기전략은 한국과 일본의 경쟁기업들이 자국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다지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스럽게 3국간의 적절한 국제분업을 이끌어 내고, 보다 높은 가격으로 정당한 부가가치를 요구하는 형태의 생산외연 확장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수없이 논의됐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묻혀버린 이런 대안을 지금 다시 꺼내드는 이유가 있다.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관계의 급격한 변화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트럼프 2기의 미국 행정부는 ‘미국우선주의’ 기조 아래 중국, 러시아, 북한 등 기존의 적성 국가들에 대한 견제를 약화시켜 나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가 이 나라 정상들과의 친분과 대화를 과장되게 자랑하고 있다. 우방국간 공조를 통해 북·중·러를 견제해 온 기존의 국제질서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방국들에 대해 무임승차하지 말라면서 군사비 부담을 떠넘기는데 진력한다. 이제 동북아는 더 이상 외부의 질서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협력과 연계를 통해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 협력에서 북한의 참여는 특히 중요하다. 북한이 물류와 에너지 공동체에 편입된다면, 연간 수십조원의 추가적 경제 이익을 기대할 수 있고, 군사적 긴장 완화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이미 변화는 현실이 되고 있다. 2023년 상하이에서 열린 한중일 국제물류세미나에선 스마트 물류 협력이 논의됐고, 일본의 주요 경제단체들은 한일 해저터널 사업의 재검토를 정부에 요청했다.
유럽연합이 1950년대 석탄·철강 공동체에서 시작해 단일시장을 만든 것처럼, 동북아도 이제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향한 깃발을 들 때가 됐다.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기술 혁신을 통한 성장 잠재력 확충은 앞으로도 꾸준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늙어가는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긴 어렵다. 세계를 무대로 다시 약진하는 젊은 나라를 꿈꾼다면, 이제 우리 지역의 경제 통합을 통해 대륙국가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생산 방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 박원주는 현재 중앙대 특임교수이자 삼성증권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를 나와 행시 31회로 공직에 들어섰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정책과 에너지, 자원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박근혜 정부에선 청와대 산업통상자원비서관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특허청장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을 자처하는 경제수석 당시엔 주로 기획재정부나 교수 출신이 선임돼 온 관행을 깨고 산업부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정돼 화제였다. 그는 한국 경제와 산업, ESG에 대해 글을 풀어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