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누가 안나 자매님 핸드폰 번호를 묻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야 말이지…. 예전엔 친한 사람들 번호는 다 외웠는데….”
‘건강염려증’보다 훨씬 중증인 어머니의 ‘치매 노심초사증’이 또 시작됐다.
“엄마, 요즘 젊은 사람들도 그래. ‘영츠하이머’라고 디지털 과의존 증세지 병은 아니야. 그래도 집 전화번호는 기억하잖아.”
“아니다. 요즘 더 심해졌다니까. 전엔 잘 다니던 병원도 얼마 전엔 한참 헤맸어.”
“음…. 운전하는 사람들도 내비게이션 없으면 맨날 다니던 길도 못 찾는다잖아. 아들이 차로 항상 모시고 다니다 보니 혼자 갈 땐 그런 거지.”
그 뒤로도 사람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약속을 깜빡 잊었다는 등 익숙한 레퍼토리가 이어졌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운동 열심히 하고, 낯선 일도 자꾸 해보세요”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부모님과의 대화 풍경이다.
■어쩌면 외로운 노인에게는 사람보다 AI가 더 나을 지도…
최근 외로운 노인과 친구처럼 대화해주는 AI 봇 ‘밀라(Meela)’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한 달에 40달러를 내면, 사용자의 인생 이력과 취미, 선호도 등을 학습한 밀라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 “오늘 기분은 어땠어요?”, “요즘 즐기는 취미는 뭔가요?” 묻고, 듣고, 공감해 준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읽으며 문득, 전성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치매 예방 효과가 있다는 또 다른 연구 결과가 떠올랐다. 그러자 성의 없이 대꾸하는 자식보다 시종일관 관심 있게 들어주고, 이전의 대화까지 기억해 맞장구쳐주는 AI 봇이 어쩌면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얼마 있다 ‘AI가 내 뇌를 먹어 치운다(Artificial Intelligence was eating my brain)’는 다소 과장된 제목의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술 전문 기자 샘 셰크너는 AI를 사용하며 자신이 갈고닦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점점 녹슬어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인지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의 말—“창의성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진다(use it, or lose it)”—을 인용하며 AI의 부작용을 경고했다.
필자 역시 관심이 깊은 주제라 관련 연구들을 찾아보았다. MIT 연구진이 발표한 AI 사용과 글쓰기의 신경 패턴에 대한 연구는 특히 흥미로웠다. EEG(뇌파) 센서를 이용해 학생들이 네 번에 걸쳐 에세이를 작성하는 동안 알파파(창의적 처리)와 베타파(논리적 사고)를 분석했는데, 처음부터 챗GPT를 사용한 학생들은 에세이를 60% 더 빨리 완성했지만, 복잡한 사고를 담당하는 신경망의 연결성은 최대 55%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만성적 AI 사용자들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주인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비슷한 문체로 수렴하는 경향까지 보였다. 반면, 처음에는 AI를 쓰지 않았던 학생들이 이후 AI를 보조 도구로 활용했을 때는 강한 신경망 연결성을 나타내며 성취 역시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이 결과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스스로 고민하고 집중해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뉴런의 활동이 일어난다. 반면, 몇 초 만에 생성된 결과를 조합하는 일에서는 그만큼의 정신적 훈련이나 사고의 깊이가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AI가 내 창의성을 먹어치우면 어쩌지?
물리학자 헬름홀츠와 인지 신경학자 클라크가 말한 “우리 뇌는 본질적으로 예측 기계”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인간의 뇌는 0.001초 단위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며, 예측이 맞을 때 쾌감을 느낀다. 결국 우리의 인지 능력은 이런 ‘예측과 검증’의 반복 속에서 발전한다. 그런데 예측 과정 없이 정답만 즉시 얻는다면, 그 지식은 깊이를 잃고 통찰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글의 초안을 AI에 맡기지 않는다. 물론 AI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 탐색에 있어 빠르고 유용하다. 그러나 핵심은 ‘AI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
이쯤 되면 내 뇌는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으로 달려간다. 십여 년 전, 속초의 한 도서관 겸 카페—향 좋은 커피와 음악, 그리고 설악산 전망이 조화된 그곳—에서 우연히 읽은 『연암에게서 글쓰기를 배우다』가 떠오른다.(굳이 사족을 길게 쓴 것은 오감이 모두 만족했던 기억들은 매번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제자 지문과 문답을 하며 글쓰기와 공부, 나아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과정을 읽기 쉽게 풀어낸 소설이었는데, 연암이 지문에게 어떻게 글쓰기를 공부했는지 묻자, 지문이 “많이 읽고 외웠다”고 답했고, 연암은 “많이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하나를 알더라도 깊이 음미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렇다. 지식의 양으로만 따진다면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의 현자보다 수천 배는 더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다빈치, 세종대왕보다 더 ‘위대한 인간’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결국 치열하게 사고하고, 경험을 융합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순간—그때 비로소 “유레카!”의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사고의 본질까지 AI에게 넘기지 말자. AI의 ‘수트’를 입어 힘을 보강하되, 수트가 우리를 대신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중요한 것은 “유레카!”의 기쁨...본질까지 AI에 넘기지 말자
그렇다고 필자가 AI 비관론자인가? 아니다. 나는 철저한 ‘도구 활용주의자’다. 다만 모든 것이 경계 없이 섞이고, 기술의 편리가 일상 곳곳에 스며드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뒤처짐의 공포(FOMO; Fear of Missing Out)’에 떠밀려 정작 자기 자신을 잃고,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하는 무기력과 공허함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해법은 단순하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그리고 일(업)과 취미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는 것이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하려 하고, 운동 중인 물체는 계속 나아가려 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함에 젖어 멈추는 순간, 근육은 급속도로 약해지고 인간다운 생의 활력은 사라진다.
그러니 정신의 근력이 약해진 노인들에게는 디지털(AI)의 도움을 빌려 감각과 기억을 깨우는 것이 오히려 삶의 활력을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반면 이미 AI에 익숙해져 사고를 멈춘 현대인이라면, ‘혹시 나는 고민할 일을 AI에게 떠넘기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만 때우는 익숙함에 젖어 있진 않은가’ 되물어야 한다.
■일상에 지쳐 삶의 의미조차 희미해질 때…
AI는커녕 사람에 치이고 일에 지친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사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 분들에게는 다음을 권하고 싶다. 잠시의 ‘멈춤’, 그리고 ‘음미’.
십여 년 전, 매일의 일상에 파묻혀 여행의 욕구조차 잃어버렸을 때, 나에게 다시 ‘의미를 찾는 욕구’를 깨워준 영화가 있었다. 바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였다.
그 영화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 한 장면,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이 히말라야에서 평생 기다리던 눈표범을 마주한 순간, 그는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그렇다. 진정한 감동은 ‘음미’에서 비롯된다. 그런 순간, 지친 일상은 다시 빛을 되찾고, 인생은 또 한 번의 여정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이런 감동과 의욕을 어찌 AI가 대신 찾아줄 수 있겠는가.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