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금융그룹 진옥동 회장(자료=신한금융)


“글로벌과 아시아 보험사들의 경우 대표이사가 직접 실적 발표를 진행하며 주주 및 투자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럴 계획 있습니까?”

이는 지난달 20일 진행된 삼성생명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지난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원년’을 선언했지만 주주들은 여전히 회사 대표 얼굴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주주들이 대표이사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보고 싶을까요. 경영의 최고 책임자로부터 회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투자 지속 여부를 판단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권한이 빈약한 ‘바지사장’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삼성금융으로부터는 좀처럼 궁금증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 애널리스트 등 시장 참여자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IR 문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공개된 신한금융그룹 진옥동 회장의 ‘주주서신’은 가뭄 속 단비처럼 신선했습니다. 공들여 직접 썼다는 점도 그렇지만, 내용 또한 풍부하고 구체적입니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 중 이렇게 정성 들여 주주들에게 공개 서신을 보낸 곳은 신한금융이 아마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번이 처음인가 싶어 예전 자료를 뒤져봤더니 지난해 이맘때도 ‘주주서신’을 썼더군요. 제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뿐, 그룹 홈페이지에도 ‘LETTER FROM CEO’란 제목으로 전문이 공개돼 있습니다. 다만, 취임 1년이 지난 무렵인 지난해와 2년이 지난 올해, 글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지난해엔 실적 중심으로 다소 건조하게 글을 써 내려간 반면, 올해는 CEO로서의 감정, 속내, 각오 등 사적인 영역까지 가감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분량도 A4 16장으로 지난해의 딱 2배입니다.

최근 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관식 부부처럼 진 회장은 1991년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달라’ 기도했던 그 마음을 편지의 서두로 삼았습니다. 부자 혹은 좋은 학교를 바라지 않던 부모의 그 마음처럼, 기업의 창업자도 1등보다는 50년, 100년 오래오래 지속되는 회사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서 말인데요. 진 회장이 취임 때부터 강조했던 ‘1등이 아닌 일류’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아주 쉬운 사례로, 설득력 있게 풀어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인은 회사를 경영할 때 ‘지속가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하더군요. 올해 초 1박2일간 진행된 경영포럼에서 오로지 ‘의무’에 대해서만 토론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보통의 경영포럼은 그룹의 재무 목표를 공유하고 한 해의 전략 방향을 논의하는 형태로 진행되지만 올해는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의무론’을 읽고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금융인이라면, 신한의 구성원이라면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만 치열하게 논의했다 합니다.

낙하산 CEO들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며 회사 경영에 접목하겠다는 보도자료를 접할 때마다 ‘그냥 그러려니’ 했었지만, 진 회장의 ‘서적 경영’은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우쭐거림이나 잘난척보단 간절함, 절박함 류의 감정이 느껴져서 그런가 봅니다. 차라리 ‘1등을 위해 매진하겠다’ 하면 쉽고 깔끔할 텐데, 굳이 ‘일류’니 ‘지속가능’이니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 하니 얼마나 마음이 초조할까.

초조함은 간절함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초조할 때 기댈 언덕을 찾기 마련입니다. 내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언덕 말이죠. 키케로의 의무론은 그런 측면에서 진 회장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언덕인가 봅니다.(저도 책을 사서 한 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진 회장의 주주서신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적극적인 데이터 공개입니다. 많은 회사들은 자사에 불리한 데이터는 공개를 꺼리게 마련입니다. 공개 의무가 있는 데이터조차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진 회장은 회사의 유·불리를 떠나, 있는 그대로 데이터를 공개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판매 상품별 연체율 추이라든가, 계열사별 부동산 PF 익스포저, 자동차 및 유통업 익스포저, 은행·증권 자산관리 고객 수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주주 및 고객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소통하겠다는 자세는 글로벌 일류 기업이 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일텐데 코스피 상장사 중에 그런 기업은 아쉽게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올해 첫 해외 IR(투자설명회)을 위해 지난 2월 일본을 찾아 나흘간 현지 주요 금융기관 및 기관 투자자들과 만났다. 사진은 오기노 아키히코 다이와증권그룹 사장과 만난 진 회장의 모습(자료=신한금융)


진 회장은 또 신한금융이 밸류업에 왜 적극적인지도 주주서신에서 공개했습니다. 일본에서 20여년 근무한 경험이 초고령화사회에 대비하는 안목을 길러줬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40%대 초반으로, 선진국(60%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40%를 60%로 만들려면 부동산값이 오르거나 주식값이 오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가계부채 2000조원 돌파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부동산은 더 이상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주식값이 오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진 회장은 기업 밸류업을 통해 개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권 시장을 연금 투자처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금융당국 및 한국거래소 관계자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설명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직장인일 때도 강조했던 사안인데 CEO가 되고 나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난해 7월 신한금융이 4대 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먼저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배경입니다.

신한금융은 애널리스트, 한국상장사협의회 등 자본시장에서 활동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해 일본 도쿄에서 ‘애널리스트 Day’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개인 투자자를 위해 다양한 채널로 설명회를 갖는 한편, 금융당국과 한국거래소가 주관하는 토론회 및 컨퍼런스에서도 적극적으로 밸류업 계획을 홍보했습니다. 이는 지난해 9월 KB금융보다 먼저 ‘코리아 밸류업 지수(100종목)’에 편입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거래소는 오는 5월 밸류업 우수기업 10개사를 선정해 표창할 예정입니다. 진 회장은 신한금융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진심을 담아 밸류업에 앞장서 온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사실 많은 긍정적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신한금융 앞에는 여러 도전과제가 놓인 게 현실입니다. 은행 다음 서열인 신한카드의 위상이 예전만 못합니다. 진 회장은 본부장급 인사를 CEO로 파격 발탁하는 방식으로 대처했습니다. 신한투자증권 역시 그룹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해외 투자에서 큰 손실이 발생했고, 대형 금융사고도 터졌습니다. 진 회장이 일류 어젠다의 첫 번째 요소로 꼽은 ‘스캔들 ZERO’가 지켜지지 못한 것이죠. 진 회장 스스로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술회했습니다. 비상대책반을 가동해 문제점을 파악했고, 대대적인 조직개편 등 개선 방안을 강력히 실행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다만, 마음 한켠에는 우려섞인 생각도 피어올랐습니다. 직원이 3명에 불과한 스타트업조차도 한마음으로 뜻을 뭉치기 어려운 기업 현실에서 하물며 직원 수가 수 만명인 대형 금융지주사야 어떻겠습니까. 회장이 아무리 ‘일류’를 외쳐도 구성원 모두에게 그 뜻이 전달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커다란 함선이 방향을 틀기 어렵듯, 큰 조직은 변화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됩니다. 임기 내 성과를 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자칫 조직과 구성원들에게 상처와 흉터로 남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선 들립니다.

진 회장의 ‘의무론’이 지속가능한 ‘신한다움’으로 승화해 시장 일각의 우려가 기우임을 증명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신한금융그룹 진옥동 회장의 주주서신 첫 페이지(자료=신한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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