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은 지난해 9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하는 사회적 가치 축제인 ‘제1회 대한민국 사회적가치 페스타’ 에 공동주관사로 참여해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공동의 솔루션을 모색하는데 힘을 보탰다. 정경선 현대해상 최고지속가능책임자(CSO)는 리더스 서밋 프로그램을 진행한 자리에서 “거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 본 기업이라면 다른 기업과의 협업을 생각하게 된다”며 기업이 앞장서서 사회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자료=현대해상)

현대해상화재보험은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았습니다. 6·25 종전 직후인 1955년, 한국 최초의 해상보험 전업회사로 설립돼 몇 차례 손 바뀜을 거친 후 1983년 고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회사 이름에 ‘현대’가 붙게 됐습니다. ‘왕회장’의 7남인 정몽윤 현 회장이 회사를 물려받았고, 1999년 그룹에서 분리·독립해 현재에 이릅니다. 현대해상은 1976년 국내 손해보험사 최초로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설립하는 등 국내 금융회사의 해외진출에 있어 선구적 기업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미국·영국·중국·베트남·싱가포르 등 8개국 해외 네트워크를 보유 중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현대해상이지만 올해 회사 분위기는 ‘70주년 경축’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회사 실적이 신통치 않습니다. 주력 상품인 실손보험에서 큰 폭의 적자가 지속돼 수익성과 건전성에 의문부호가 따라붙습니다.(관련기사 : 실손보험에 발목잡힌 ‘현대해상’) 그 여파로 올해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결산배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밸류업’ 흐름에서 이탈하면서 지난해 3만원 위에서 움직이던 주가는 지난 4월 2만원이 위협받는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정몽윤 회장의 바른 성정이 스며들어 현대해상은 착하고 반듯한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기업이지만 최근에는 이런 자긍심에 흠집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실손보험에서 파생된 문제인데요,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보험금 부지급 논란으로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간단치 않은 문제지만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 창립 70주년에도 실손보험 홍역에 '한숨'

어린이보험 시장점유율 1위인 현대해상은 2023년 5월 발달지연 아동 보험금 지급과 관련해 ‘민간치료사에 의한 치료는 지급 대상이 아니다’며 보험금 지급 기준을 강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험금이 끊긴 부모들이 금융감독원에 집단 민원을 제기했고, 그해 국정감사에서 현대해상 CEO가 증인으로 채택됐습니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현 대통령 비서실장)이 갈등 조정으로 방향을 틀어 봉합이 되긴 했습니다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해당 이슈가 다시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발달지연 아동 치료는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2019년 터진 ‘코로나 사태’는 영·유아·어린이의 사회성 발달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대면접촉 제한 등 사회활동 전반에 제약이 가해지면서 정상적인 교육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 결과 ‘내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나’ 의구심을 가진 부모들이 급증했고, 이는 관련 검사·진료·치료의 급증으로 이어졌습니다. 현대해상의 발달지연 관련 실손보험금 지급액을 살펴보면 코로나 사태 전인 2019년 150억원에서 2023년 957억원으로 6배 넘게 증가했습니다. 현대해상 입장에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보험금을 넋 놓고 쳐다보고만 있을 순 없어 고육지책을 내놓은 것이었죠.

이 이슈에는 과잉진료 문제도 숨어 있습니다. 정무위원회에서 실손보험 이슈를 다룰 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됐습니다. ‘아동발달센터’를 급조해 과도한 치료비를 받으며 검증되지 않은 치료를 일삼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일부 치료센터는 실손보험금을 노린 보험 브로커의 개입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정상적인 진료 행위가 아닌, 보험사기에 가까운 행태입니다. 정무위 직전 보건복지위 간사였던 강훈식 의원은 이런 전후 사정을 잘 알기에 현대해상 CEO를 증인석에 세워 질타하기보다 좌담회를 열어 원활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쪽으로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깐깐하기로 정평이 난 강훈식 의원이 재벌 비호 부담에도 불구하고 막판 증인 신청을 철회한 배경입니다. 강 의원은 당시 국감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이게 원래는 국가가 해 줘야 되는 역할입니다. 실손보험의 관점이 아니라, 발달지연을 국가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문제인데 정무위에 와서 봤더니 그 역할을 보험사가 하겠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중략) 이 문제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보건복지부, 금감원, 금융위에서 제도적인 미비점들을 채우는 것들도 앞으로 좀 상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대해상은 발달지연 아동의 조기 개입 솔루션을 찾기 위해 150억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다.(자료=현대해상)

■ 정부도 꺼리는 사회문제에 민간기업이 '앞장'

이 정도 홍역을 치렀으면 손을 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사실 대한민국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유아, 어린이 분야는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출산파업’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니까요. 성장이 정체된 정도가 아니라 매년 급격히 쪼그라드는 시장입니다. 현대해상이 점유율 1위가 된 것도 적극적으로 영업에 나섰기 때문이라기보단 다른 회사들이 상대적으로 어린이보험을 등한시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겁니다.

그런데 지난 18일,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현대해상이 발달지연·발달장애 아동을 위해 150억원을 내놓는다는 메일이었습니다.(관련기사 : 현대해상 “발달장애 골든타임 솔루션 공모에 150억 지원”) 1억5000만원도 아니고, 15억원도 아니고, 자그마치 150억원. 웬만한 상장회사의 한 해 이익과 맞먹는 규모입니다. 현대해상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하니 2024년 한 해 동안 집행된 사회공헌 금액이 66억7700만원입니다. 그러니까 회사 3년 치 사회공헌 예산을 발달지연 아동 문제 해결을 위해 오롯이 쏟아붓겠다는 겁니다.

사업 방식도 신선했습니다. 발달장애 아동의 경우 치료 골든타임을 고려했을 때 이전 발달지연이나 경계성 지능 장애 단계에서 조기 개입이 중요한데 진단 및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에 현대해상은 세브란스병원,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임팩트스퀘어와 협력해 ‘조기 개입 솔루션’을 공모하기로 했습니다. 스타트업, 병원, 대학, 연구기관, 발달센터, 클리닉 등 누구라도 솔루션을 제시해서 선정되면 최대 12억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임상실험 등 최종 성과가 좋으면 최대 5억원의 성과보상금도 지급됩니다. 이런 공모 프로젝트는 구글, 아마존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보수적이고 올드한 보험사가 진행한다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아 홍보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대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게 누굽니까?
=(잠시 망설이더니) 이사입니다.
-네? 이사요? 어느 이사요?
=아니, 이사 아니고 2세요.

2세라고 말한 걸 제가 ‘이사’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죠. 지난해부터 현대해상 경영에 참여 중인 정몽윤 회장의 아들, 정경선 전무(CSO, 최고지속가능책임자)를 지칭한 겁니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라면 그럴 만하죠.

현대해상의 사회공헌 방향성. 현대해상은 "우리 사회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치로 가득한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며 2012년 업계 최초로 사회공헌 전담 조직을 구성했다. 아동·청소년의 건강한 성장에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중점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혁신과 변화를 지원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자료=현대해상)

■ 착하고 반듯하게 성장한 재벌가 3세, '부전자전'

1986년생(39세)인 정경선 전무는 20대 때부터 사회적기업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습니다. 사회적기업을 다룬 책 ‘보노보 혁명’을 읽고 느낀 바 있어 2011년 아산나눔재단 인턴으로 들어갑니다. 2012년 사회적기업을 돕는 루트임팩트를 창업했고, 비영리 법인의 한계를 느껴 2014년 소셜 벤처투자 회사인 HGI(에이치지이니셔티브)를 설립했습니다. 2017년 서울 성수동에 연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는 사회혁신가 양성소로 명성을 떨쳤죠. 한마디로 기업경영보다는 사회문제 해결에 더 관심이 많은 재벌가 자제입니다.

“아동과 청소년, 청년 등 미래 세대는 복잡한 사회 문제에 직면한 당사자이지만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큰 임팩트를 만들고 싶다면 미래 세대 본인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설계하고 참여하면서 실제 경험을 쌓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방식이 대기업들이 함께 고민할 사회공헌의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선 전무가 지난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입니다. 소셜임팩트 부문에서 왜 대기업으로 진로를 틀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울러 발달지연 아동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젝트 ‘아이마음 탐사대’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몽윤 회장은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기 전부터 사재를 털어 소셜임팩트 분야에 꾸준히 지원을 해왔습니다. 부자(父子)의 루트임패트 출연금만 170억원에 달합니다. 현대해상은 정 전무가 ESG 분야에서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이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정 전무의 지속가능실은 사회공헌뿐만 아니라 신사업 투자, 디지털 전환, 커뮤니케이션 등 미래 성장을 위한 다양한 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정 전무 주도로 현대해상이 직접 투자를 단행한 스타트업은 케어닥, 차봇, 니어스랩 등 총 18곳에 이릅니다.

■ 현대해상이 말하는 존재의 이유, "더 따뜻한 사회"

다만, 본업인 보험 분야의 전문성과 경영 능력이 입증되지 않아 회사 안팎에선 ‘3세 경영’에 대해 불안한 시선도 있습니다. 발달지연 아동 문제를 대하는 자세와 스케일만 봐도 수익성이 우선인 영리법인인지, 사회공헌이 우선인 비영리법인인지 헷갈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영리법인이든, 비영리법인이든 지속가능성을 치열하게 고민해 온 정 전무라면 아버지가 정성 들여 키운 현대해상을 말아먹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절대 말아먹어서는 안된다고 해야 할까요.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무모하게 덤비는 회사가 사라지게 되면, 단순히 영리법인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보다 따뜻한 사회를 위한 많은 이들의 염원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정 전무 스스로도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이런 대가들보다 회사를 망하게 하지 않고 운영하는 모든 기업인들을 존경한다”고 했으니 걱정보다는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대해상 창립 70주년을 축하합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돼 100주년 기념행사도 꼭 보고 싶네요. 향후 30년 동안 혹여라도 위기가 찾아온다면 미약하나마 ‘돈쭐내기’에 앞장서야겠다는 어쭙잖은 생각도 해봅니다.

현대해상 창립 70주년 엠블럼 로고. 현대해상은 1955년 국내 최초 해상보험 전업회사로 시작, 우리나라 대표 손해보험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오는 2025년 10월 17일에는 창립 70주년을 맞는다.(자료=현대해상)

[뷰파인더] 코너는 국내 금융회사의 이슈와 전략을 조금 더 실감나게 보여주는 콘텐츠입니다. 현재의 기업 전략을 이해하려면 기업의 발자취, 그간의 경영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기업 CEO와 대주주에 대한 평가도 있어야겠죠. 이를 통해 기업의 성장성과 미래를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