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자료 (사진=국정기획위원회)
정부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통해 재생에너지 설비츨 확충하고 ‘에너지고속도로’ 구축에 나섰지만, 계획의 핵심은 기후위기 대응보다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대기업 중심 산업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맞춰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방 전력을 수도권으로 끌어오는 고도의 중앙집중형 송전망은 지역사회 갈등과 생태 훼손을 불러올 수 있고 민간 참여 확대가 사실상 에너지 민영화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표방한 정책이 오히려 공공성과 지역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 에너지고속도로…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로
2030년 목표 78GW는 원전 70기 이상을 동시에 가동하는 수준으로, 글로벌 RE100 확산과 반도체·AI 산업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수치다. 전남·서남해·제주에는 해상풍력 벨트, 경기·서해안·영남 내륙에는 태양광 벨트가 조성되며, 농지 태양광을 활용한 ‘햇빛 연금’ 모델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 목표치는 윤석열 정부 시절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큰 차이가 없고, 발전 비중으로 환산하면 20% 내외에 머무는 ‘답습형 계획’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가장 큰 과제는 송전망이다. 호남·서남해 지역에서는 이미 송전 용량을 초과해 일부 발전기가 출력을 제한당하고 있다. ‘에너지고속도로’는 초고압직류송전(HVDC)망이다. 정부는 이를 ‘분산형 에너지 체계’라고 규정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정반대다. 초대형 전력 수요처인 수도권으로 지방 전력을 대규모로 끌어오는 고도의 중앙집중형 전력망이기 때문이다.
■ 주민 반발과 생태 훼손…숨은 사회적 비용
현재 수도권은 비수도권에서 10GW 이상을 공급받고 있으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성되면 최대 30GW의 추가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입주하는 용인 클러스터만 해도 16GW가 필요한 상황이다. 결국 에너지고속도로는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로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송전선로 건설은 과거 밀양 송전탑 사태와 유사하게 지역사회의 강한 반발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다. 주민 수용성과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계획은 좌초될 수 있으며 지역사회 갈등과 생태계 훼손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HVDC 건설은 변압기·중전기기·케이블 등 전력 장비 산업 전반에 파급 효과를 낼 수 있다. 산업계에서는 경부고속도로가 한국 산업 지형을 바꾼 것처럼 HVDC가 새로운 투자 테마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현재 한국의 태양광·풍력 발전소의 90% 이상은 민간 소유이며, 해상풍력 사업의 절반 이상은 해외 자본이 운영한다. 송배전망까지 민간 참여가 확대되면 에너지 공공성은 약화되고, 국가 전력 체계가 시장 논리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 ‘서해안 해저 고속도로’의 데자뷔…민간 자본‧대규모 송전망
윤석열 정부 역시 민간 참여 확대를 통해 ‘서해안 해저 전력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다가 거센 비판 여론에 직면해 무산된 바 있다. 이번 계획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민간 자본 유치와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라는 점에서 당시 구상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현 정부가 강조하는 ‘공공기관 혁신’ 기조와 맞물리며 우려는 더욱 커진다. 대통령실은 최근 공공기관 통폐합 방침을 공식화했고, 한전과 발전 5사가 구조조정 1호로 지목됐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발전공기업의 역할을 인공지능(AI)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고, 전력망·계통 접속의 중립성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과 맞물리면서, 송배전망 개방 가능성을 높인다는 관측을 낳고 있다.
■ 지방은 희생, 수도권은 배불리기…내부 식민지화 논란
일각에서는 에너지고속도로를 두고 “일제 강점기 곡물 수탈 철도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영호남·동해안 지역을 전력 생산 기지로 만들고, 수도권 산업단지로 전력을 수송하는 구조가 내부 식민지화이자 반생태적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확충은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번 계획이 수도권 대기업을 위한 집중형 송전망으로 귀결되고, 민간 자본 확대가 사실상 민영화의 전주곡이 된다면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