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엔지니어링의 모듈러 건축기술로 지은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일대 13층 높이 국내 최고층의 GH 모듈러 주택. (사진=현대엔지니어링)
“12, 13층 아파트도 공장에서 조립해 쌓아올려요.”
이제 이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건설 현장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때 ‘저층 임시건물’의 대명사였던 모듈러 건축은 옛 말. 이제는 10층을 넘어 13층, 20층을 바라보는 초고층 주거시설로 변모하고 있다. 중심에는 현대엔지니어링과 포스코A&C가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건설 산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
■ 현대엔지니어링, 13층 모듈러 아파트로 ‘기술의 벽’ 넘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이곳에 우뚝 선 ‘용인 영덕 경기행복주택’은 국내 모듈러 건축의 새로운 이정표다. 총 106세대, 13층 규모의 이 아파트는 “모듈러는 12층이 한계”라는 편견을 깼다. 특히 13층 이상 고층 건축물에 필수적인 3시간 이상 화재 내성을 완벽히 갖춘 점은 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지난 2012년부터 모듈러 건축을 연구하기 시작해 기술력을 이번 프로젝트에 집약했다. 번들형 기둥과 내진 및 내화 H형강 등 고층 모듈러에 특화된 구조기술을 적용해 내화와 내진 성능과 공간 활용도를 크게 높였다. 네 가지 골조 접합 방식은 현장 조립의 정밀도와 구조적 일체감을 동시에 잡았다. 여기에 층간소음 저감, 기밀·단열·방수 등 주거 품질까지 꼼꼼히 챙겼다.
현대엔지니어링의 H-모듈러 랩(H-Modular Lab). 현대제철 당진연구소에 위치했다. (사진=현대엔지니어링)
현대엔지니어링의 기술 실증 무대는 충남 당진에 위치한 ‘H-모듈러랩(H-Modular Lab)’이다.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모듈러 실증 연구소다. 실제 아파트와 동일한 조건에서 단열·기밀·방수·층간소음 등 주거 성능을 종합적으로 테스트한다. H형강 모듈러 구조시스템, 하이브리드 내화시스템, 철강 슬래그 활용 친환경 포장재 등 첨단 기술이 총동원됐다.
연구소 관계자는 “모듈러 건축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실험실이 아닌 실제 환경에서의 검증이 필수”라며 “이곳에서 얻은 데이터가 곧 시장 신뢰의 근거가 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현대엔지니어링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74가구 규모의 모듈러 공공주택 프로젝트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도 국내 최고층 12층 규모의 모듈러 주택이다. 향후에는 20층 이상 초고층 모듈러 아파트 건설도 목표로 삼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은 “20층 이상 초고층 모듈러 아파트도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라며 “기술 혁신을 통해 국내 모듈러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포스코A&C, 광양 기가타운으로 ‘글로벌 모듈러’ 혁신 입증
전남 광양제철소 한켠. 12층 높이의 ‘기가타운(Giga Town)’ 기숙사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포스코A&C가 설계·시공을 주도하고, 포스코이앤씨와 협업해 완성한 국내 최고층 모듈러 건축물이다. 총 500여실 규모의 기가타운은 모듈러 공법과 RC(철근콘크리트) 공법을 각각 적용한 두 개 동으로 구성됐다. 모듈러 건축의 품질과 효율성을 실증하는 리빙랩인 셈이다.
이러한 기술력으로 포스코A&C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모듈러 전시회인 미국 모듈러 건축협회(MBI) 주관 ‘2024 World of Modular’에서 광양 기가타운으로 모듈러 기숙사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으로는 유일한 수상이다.
포스코A&C가 12층의 모듈러로 준공한 포스코 광양 기가타운 전경. (사진=포스코A&C)
전문가들은 포스코A&C가 12층 높이의 200개 모듈 유닛을 정교하게 쌓고, 층당 20실(총 길이 140m)의 유닛을 안정적으로 이어 붙인 기술력, BIM(건설정보모델링) 기반의 제작·조립 최적화, 디지털 목업(Mock-up)과 3D 스캐너 검측 등 스마트 건설 기술이 높이 평가됐다.
기가타운의 핵심은 속도와 친환경이다. 200여개 모듈을 공장에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전체 공기를 20%인 4개월을 단축했다. 건설 폐기물도 50% 이상 줄였다.
현장 작업을 최소화해 안전사고 위험과 건설폐기물로 인한 소음, 미세먼지, 탄소배출은26.5%로 대폭 줄였다. 실제로 기가타운 현장에서는 기존 현장 대비 작업 인원이 40% 이상 줄었다고 한다. 소음·분진 등 환경 민원도 크게 줄었다고 포스코 측은 설명했다.
포스코A&C 관계자는 “모듈러동은 바닥충격음, 세대 간 차음, 실내 공기질, 결로, 기밀 등 거주성능과 에너지 효율, 유지관리에서 모두 우수성을 입증했다”며 “포스코이앤씨와의 협업을 통해 모듈러와 RC 공법의 장단점을 실증 비교하며 그룹 차원의 시너지를 높였다”고 했다.
포스코A&C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주에 모듈러 제조시설을 신설하고, 주택·학교·병원 등 핵심 인프라 복구를 모듈러 방식으로 신속하게 추진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해체·재활용률 80% 이상을 목표로 한다. 전쟁 후 재건의 새로운 글로벌 모델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포스코A&C가 지난 2024년 3월22일 미국 모듈러 건축협회 주관 ‘2024 World of Modular’에서 포스코 직원 생활관인 광양 기가타운으로 모듈러 기숙사 부문 우수상을 수상. (왼쪽부터) 포스코A&C김선식 SH지원그룹장, 척 월든 미국 모듈러 건축협회 전협회장. (사진=포스코A&C)
■ ESG와 스마트 건설, 고층 모듈러의 진짜 동력
현대엔지니어링과 포스코A&C의 고층 모듈러 도전은 단순한 구조 기술을 넘어, 건설 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전환과 맞닿아 있다.
모듈러 공법은 기존 RC 공법 대비 건설 폐기물을 절반으로 줄이고, 탄소 배출량도 최대 60% 감축할 수 있다. 기가타운의 경우 공사 기간 단축, 폐기물 처리 비용 절감, 현장 노동자 안전사고 감소 등 실질적 변화를 보여줬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시공 전 과정을 디지털화해 에너지 소비와 자원 투입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디지털 트윈’ 체계를 구축 중이다. 디지털 트윈은 설계부터 시공, 운영까지 건축물의 전 생애주기를 가상 공간에서 완벽하게 구현하는 기술로, 건설 산업의 새로운 운영 패러다임으로 각광받고 있다.
양사는 층간소음, 결로, 공기질, 차음 등 실제 주거성능을 공공기관 수준의 인증 기준으로 실증하고 있다. 이는 민간 모듈러 주택 시장 확대에 필수적인 요소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모듈러가 임시건물이나 저가형 주택에 국한됐지만 이제는 주거 품질과 친환경성 모두를 갖춘 미래형 주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내다봤다.
■ 정부 정책도 고층 모듈러 시대 대비…해외인증·표준차이 과제도 남아
정부도 모듈러 고층화 확산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부터 고층 모듈러 건축을 위한 설계 기준 정비, 용적률 인센티브, 공공 발주 우대, 인허가 패스트트랙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LH, GH, SH 등 공공 발주처의 중·고층 모듈러 적용 사례도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로 LH는 2027년까지 세종시에 450가구 규모의 국내 최대 모듈러 단지를 구축할 계획이다. 오는 2030년까지는 연간 3000가구 공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책 변화는 민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용적률 인센티브와 인허가 간소화 덕분에 대형 건설사뿐 아니라 중견·중소 건설사들도 모듈러 시장 진출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모듈러 시장 규모는 2025년 2조원, 2030년에는 5조원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해외 인증 및 표준과의 차이, 내진 성능에 대한 국제 실증 데이터 부족, 현장 조립 정밀도의 공통 기준 부재 등은 여전히 산업 성장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각 사는 국내외 인증 확보, 글로벌 모듈러 코드 분석, 현지 생산거점 구축 등 후속 전략을 마련 중이다.
■ ‘높이’에서 ‘도시’로…현대ENG 복합개발, 포스코A&C 재난대응형 주택
현대엔지니어링과 포스코A&C의 모듈러 혁신은 단순히 건축물의 ‘높이’ 경쟁에 머물지 않는다. 두 기업은 건설의 출발점인 설계부터, 생산과 시공, 운영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제조형 시스템 산업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현장 중심 건설에서, 공장 중심의 생산 시스템으로 완전히 패러다임이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마트 팩토리에서 모듈을 생산하고 최소 인력으로 현장에서 조립하며 디지털 트윈 기술로 건물의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실시간 관리하는 구조. 이것이 ‘모듈러 플랫폼 산업’의 청사진이 될 전망이다.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단순 건축 방식의 전환이 아니다. 도시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고층을 넘어서 도시 전체를 모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현대엔지니어링은 PC 라멘조 시스템을 바탕으로 상업·업무·주거·공공시설을 결합한 복합개발, 도시 단위 모듈러 사업까지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포스코A&C도 MUTO 시스템을 활용해 재난대응형 주택이나 이동식 병원, 원격교육센터 등 특수 목적형 모듈러 시장을 다각화하며 해외 현지 생산거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