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정석(定石)이 사라졌다?

최근 바둑을 보며 가장 놀라운 변화는 대국을 시작하고 불과 5수 만에 삼삼(3•三)을 두는 진행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대방의 화점에 날일 자 걸침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삼삼 침입은 프로바둑의 초반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하수 바둑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AI 시대에 삼삼 침입은 최신 트렌드이자 대표적인 정석으로 부상했다.

AI 바둑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제는 인간의 바둑이 아니라, AI의 바둑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앞다퉈 알파고의 후예들이 반상을 지배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KataGo를 비롯해 Leela Zero(벨기에), Fine Art(Tencent), Golaxy(중국), PhoenixGo(중국), DeepZen(일본), Crazy Stone(프랑스), ELF OpeGo(Facebook AI) 등 수많은 AI 바둑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알파고 이전, 프로기사들은 다양한 연구회에서 집단 연구를 통해 최신 정석을 개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종국 후 장시간 복기를 통해 한 판의 바둑을 치열하게 해부했다. 하지만 알파고 이후로 바둑계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국이 끝나기 무섭게 돌을 쓸어 담고 AI 프로그램을 돌려본다. 바둑 학습은 연구가 아니라 공부에 가깝다. AI 스승님을 모시고 50수까지 인공지능의 수를 외우고, 그 다음에는 감각을 익힌다. AI가 알려주는 블루 스폿은 이제 정석을 넘어 완벽한 정답이다. 세계 최강 신진서 9단의 별명이 오죽하면 ‘신공지능’이랴.

지난 수백 년 동안 통용되었던 정석은 그저 고정관념의 다른 표현이었을 지 모른다. 이렇듯 반상에서 어떠한 감정도 편견도 없는 AI 바둑은 바둑계의 지형을 완전히 재편했다. 반상의 낭만이나 인간적인 수담(手談)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세출의 바둑 영웅마저도.

 


#7 전격적인 이세돌의 은퇴, 그 이후

이세돌은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날이 올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바둑의 가치가 없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바둑은 인간 고유의 영역임을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그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2019년 11월 이세돌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는 바둑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24년 4개월 간의 프로기사 생활을 마감하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단순한 승패를 넘어서 예(藝)와 도(道)가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로 배웠다. 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단순한 대결로 승패를 결정짓는 알파고와의 승부에 깊은 회의감에 빠졌으리라.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의 본질이 바뀌었고, AI의 기계적인 수들이 인간의 두뇌를 뛰어넘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은퇴를 결심한 것이다.

최근 들어 AI가 쏟아내고 있는 지브리 스타일의 결과물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비수로 다가오고 있다. 무수한 밤을 세워가며 빚어낸 예술가들의 고유한 창조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세돌의 은퇴 역시 생성형 AI가 만들어내고 있는 아류작에 창작자들이 겪고 있는 절망감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독특하고 화려한 기풍(棋風), 집념의 투혼, 드라마틱한 승부, 남들은 지나쳤던 오랜 관행에 대한 도전, 불의에 굴하지 않는 거침 없는 언행으로 수많은 이슈를 만들었던 이세돌. 희대의 승부사로 인류에게 유일한 승리를 안겼던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스스로 퇴장했다.

이홍렬 조선일보 바둑전문기자는 36세의 이세돌이 은퇴를 결심한 배경으로 지고 못사는 타입의 ‘승부 결벽증’을 꼽았다.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 더하고 싶은 점이 있다. 그는 평생 바둑을 두면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외로운 개척자였다. 누구도 쉽게 두지 않는 수를 오롯이 고집했다. 그런 이세돌의 외길 인생이 갑자기 멈췄다. 알파고가 나오면서 목표는 사라졌고, 어떠한 동기 부여도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바둑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바둑은 초반 포석부터 중반 전투, 사활, 형세 판단, 끝내기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야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의 이세돌은 항상 중반전에 돌입할 무렵 비세에 빠지기 일쑤였다. 세계대회를 14차례나 석권한 바둑 천재에게 초반 포석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을까. 요는 모든 정상급 기사들이 사용하는 정석이 아닌 새로운 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사석에서 초반부터 고전하는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공동연구의 결과물인 정석은 쉬운 길이지만, 내 바둑이 아니다.”

정석이란, 털끝 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최선의 수를 주고받는 공식과 같다. 정석이 아닌 수를 두는 순간, 제대로 응수하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바둑판의 1/4 가량을 한순간에 차지해버리는 눈사태 정석 같은 대형 정석은 그가 가장 싫어할 만한 정석의 표본이다. 본인의 창의력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은 항상 가시밭길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이세돌의 바둑 외길이었다.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었던 2021년, 필자는 이세돌 9단에게 그만의 색깔이 담긴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는 주저 없이 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종류의 보드게임을 직접 기획해 세상에 내놓았다. 은퇴 후에도 그는 바둑을 닮은 방식으로 보드게임 개발과 보급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2월, 이세돌은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계공학과 특임교수로 임용되어 새 학기부터 강단에 서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이끈 장본인으로서 통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통해 창의적 사고와 AI 융합을 탐구하고 있다.

조만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두뇌 서바이벌 오리지널에도 출연했는데 바둑 천재의 예능 나들이에도 사뭇 기대가 크다. 자서전 준비도 한창이라 한다. 은퇴한 이 치고는 여간 바쁜 행마가 아닌가.

(다음 편에서 계속)

바야흐로 AI 세상이다. 2016년 인류에 경종을 울린 알파고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은 ‘신들의 게임’이라 불리는 바둑을 한순간에 장악했고, 최근 생성형 AI 챗GPT의 폭발적인 성장은 AI 패권 시대를 앞당겼다. 인공지능의 촉매제가 되었던 바둑을 통해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영역까지 일상에 스며든 AI 별천지를 둘러보고, 당면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AI와 동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한다.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