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KCON LA 2024’에 마련된 올리브영 부스. (사진=CJ올리브영)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내 산업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K-푸드와 K-뷰티로 한참 주가를 올리던 유통가도 예외는 아닌데요.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관세 등으로 엄포를 놓으면서, 그간 미국 시장에 공을 들였던 유통 업체들도 대응책 마련을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파리바게뜨 북미 사업을 확장 중인 SPC그룹은 오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미국 텍사스 주에 1억6000만 달러를 투자해 제빵공장 건립에 나섰습니다. SPC 그룹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라 관세 제도 등 미국 산업 정책 변화를 고려해 공장 건립 추진에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죠. 공장이 완공되면 계열사인 SPC삼립 현지 전략 거점 등으로도 활용한다는 계획입니다. ‘유통 공룡’으로 불리는 CJ올리브영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에 현지 법인을 다시 설립했습니다.
CJ올리브영은 지난 2020년 뉴욕 법인을 청산하며 미국 오프라인 시장에서 철수했었죠. 그동안은 올리브영 글로벌몰을 통해 온라인으로 제품을 판매해 왔는데, 다시 오프라인 매장을 내며 현지화를 강화할 예정입니다. ‘가성비’를 무기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던 화장품 업체들도 좌불안석인데요. ‘K-뷰티’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이 대부분 중저가 인디 브랜드인 만큼, 관세 부과로 가격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죠. 코스맥스와 한국콜마 등 화장품 브랜드 제품을 위탁생산하는 제조업체에는 미국 생산 가능 여부를 타진하는 문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콜마 관계자는 "미국의 관세 조치에 따라 화장품 고객사들의 향후 부담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다만 미국 1공장과 상반기에 완공 예정인 미국 2공장을 활용하는 등 관세 조치 영향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에서 시장 변화에 적극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현지진출’…”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부산에 자리잡은 농심 녹산 공장 전경. 농심은 지난해 미국 제3 공장 건립을 유보하고 녹산국가산업단지에 수출전용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사진=농심)
유통가가 트럼프발 관세 충격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미국이 그만큼 중요한 시장으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수산업에 머물러 있던 과거와 달리 최근 유통업체들은 몇년새 빠르게 해외 진출을 늘려가고 있죠. K-팝과 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든든한 우군으로 삼아 국내 내수 시장이 가진 한계를 해외진출을 통해 타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닭신화’를 쓴 삼양식품의 경우 지난해 4분기 미국 매출은 137% 상승 한 1104억원으로 전체 해외 매출 중 3할 가까이 차지하는 최대 수출시장이 됐습니다. 현재 전량 수출하는 만큼 관세가 부과될 경우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죠.
미국 시장이 그토록 유망하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현지에 공장을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기업들의 셈법은 훨씬 복잡합니다. 대개 해외 공장 건설은 국내보다 생산비를 낮추기 위한 목적이 큰데, 미국은 선진국인 만큼 현지 인건비와 물가 등이 높아 생산비 역시 비싼 편입니다. 게다가 최근 강달러 추세가 이어지면서 원화로 환산한 투자비용은 훨씬 늘어났죠. 널뛰기하는 환율은 공장 건설에 따른 편익 계산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관세보다 생산비와 운송비 절감분이 더 크다고 하더라도, 생산시설 증설 자체가 기업에겐 면밀히 따져봐야 할 사안입니다. 수요예측에 실패해 유휴설비가 늘어난다면 곧바로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특히 외국의 경우 국내와 규제 등 제도적 여건이 다른 점이 많아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실제로 공장 건물을 올리는 시간보다 타당성 검토 등 준비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고 하죠. 위탁생산 방식도 명쾌한 해답이 되긴 어렵습니다. 가격과 품질 유지 등 따져봐야 할 것이 많은데, 정작 조건에 맞는 파트너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형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합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강력한 소프트 파워를 갖게 되면서, 업체들도 이를 마케팅에 활용해 왔는데요. 실제로 미국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인디 브랜드 화장품 등은 한국에서 생산됐다는 점 덕분에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 먹고 쓰는 제품에서 믿고 구매할 수 있다는 소비자 인식은 큰 자산이죠. 상대적으로 브랜드파워가 약한 중소업체들일수록 현지생산만이 능사가 아닌 셈입니다.
트럼프가 재선으로 집권했다는 점도 고민을 더 키우는 요소인데요. 이번에 재선된 트럼프의 임기는 4년을 끝으로 종료됩니다. 미리 해외진출을 준비해 왔던 기업이 아니라면 적시에 대응하긴 애매한 시간이죠. 게다가 당장 관세 부과가 현실화되지 않은데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관세에서 이어 다른 규제로 이어질지도 불확실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다수 중소기업 등은 불안속에 미국 정책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죠. 그나마 기존 미국 생산시설을 보유한 기업들은 여유를 갖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지만, 많은 기업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