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생산된 후판

조선업의 ‘뼈대’ 역할을 하는 후판(厚板)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철광석과 석탄 등 원자재 가격은 물론, 중국 철강사의 수출 공세, 조선사의 수주량, 환율, 글로벌 무역 정책 등 국내외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후판 가격은 매번 협상의 테이블 위에서 치열한 줄다리기의 중심이 되고 있다.

오르고 내리는 철판값…무엇이 결정하나

후판은 두께 6mm 이상의 두꺼운 철판으로, 선박 제조 원가의 20~30%를 차지한다. 그만큼 가격이 조선사의 수익성과 직결되며, 가격 인상을 둘러싼 협상은 조선사와 철강사 간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2021년 톤당 120만 원을 넘기도 했던 후판 가격은 2022년 하락세를 보이다가 2023년 하반기 이후 반등세로 돌아섰다.

후판의 주원료인 철광석 가격은 글로벌 후판 가격의 근간이다. 스틸웨어에 따르면 1일 철광석 가격은 톤당 98달러로 1개월 전에 비해 5.8% 감소했다. 3개월 전보다는 18%, 1년 전보다는 18.3% 감소한 수치다. 그러나 6일에는 99달러로 전일보다 1% 오르며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철광석 가격 변동(자료=스틸웨어)

수요 측면에서 조선업황도 중요하다. 2023년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약 4,000만 CGT(표준화 톤수)로, 전년 대비 15% 증가했다. LNG선과 컨테이너선 발주가 몰리면서 국내 조선 3사(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의 수주잔량도 눈에 띄게 늘었다. 수주가 늘면 후판 수요도 늘고, 이는 철강사에 유리한 협상 여건을 만든다.

가격 상승에는 중국 변수도 빠질 수 없다. 최근 정부가 중국산 후판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산 가격이 톤당 90만원대 중반까지 급등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는 지난 2월 중국산 후판에 대해 27.91~38.02%의 고율 관세를 확정했고, 이는 지난달 24일부터 적용됐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산 물량이 줄며 국내산 후판 가격 상승 압력도 커졌다.

“우리가 도와줬잖아”…엇갈린 감정의 골

지난 20여 년간 후판 가격 협상은 조선사와 철강사가 번갈아 가며 주도권을 잡아왔다. 2000년대 중반 조선업 호황기에는 철강사의 입김이 셌다. 2008년 조선용 후판 수요는 930만 톤이었지만, 국내 철강사의 공급능력은 640만 톤에 불과했다. 부족분은 일본 등에서 수입해야 했고, 이로 인해 가격은 톤당 11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철강사의 대규모 증설과 조선업 불황, 중국산 저가 공세가 맞물리며 상황은 역전됐다. 후판 가격은 2015년 이후 톤당 50만원 수준까지 추락했다. 철강사들은 조선업계의 위기를 고려해 가격 인상을 자제했지만, 이로 인해 국내산 후판이 중국산보다 저렴해지는 역전 현상까지 벌어졌다.

2020년 들어 조선업이 회복세를 보이며 다시 균형을 찾아가던 가격 협상은, 2021년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조선사들이 LNG선 수주를 휩쓸며 호황을 맞았지만, 철강사는 코로나19 여파와 철광석 가격 급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톤당 70만원대였던 가격이 하반기에는 110만원대로 급등했고, 양측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협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준 없는 싸움…해법은 없을까?

두 산업은 협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가격 협상에서는 평행선을 달린다. 그렇다고 정부가 중재에 나서기도 어렵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악순환을 끊기 위해 산업 차원의 협력 모델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일본은 조선과 철강업계 간 긴밀한 협력으로 자국산 후판을 우선 사용하고, 철강사는 가격을 조정해주는 자율적 상생 구조를 갖췄다.

후판 가격 갈등의 본질은 ‘명확한 기준의 부재’다. 현재는 사실상 기업별 재무 여건과 시장 심리에 의존하는 ‘수작업 협상’에 가깝다. 이에 따라 업계는 산업 차원의 합리적인 가격 산정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과 철강은 균형을 잃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지금 같은 조선 호황기에 단기 원가 절감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국내 철강업계와의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