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은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최윤범 회장, 마이클 윌리엄슨 록히드마틴 글로벌부문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구매 및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사진=고려아연)

무역의 무기가 바뀌고 있다. 미국은 ‘공급망 실사법’으로 반도체·배터리·방산까지 원자재 출처를 추적하고, 유럽은 ESG 실사를 새로운 시장 규칙으로 내세운다. 더 이상 관세와 보조금이 아니라 투명성과 지속가능성이 수출의 관문이 된 것이다. 한국 산업은 생산라인 안팎의 모든 과정을 증명해야 하는 낯선 숙제 앞에 서 있다.

■ 미국 ‘공급망 실사’···새로운 무역 장벽

미국은 지난해부터 반도체와 배터리 원자재를 대상으로 공급망 실사법을 본격 적용하기 시작했다. 배터리의 경우, 리튬·니켈·코발트 같은 핵심 광물이 중국이나 러시아 등 ‘우려국가’에서 조달되면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없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은 호주·캐나다 광산과 장기 계약을 맺었고, SK온은 인도네시아 니켈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했다. 삼성SDI도 유럽·북미에서 리튬·코발트 재활용 네트워크를 확대 중이다. 반도체는 더 까다롭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의 원산지까지 추적을 요구하면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탈중국 공급망 전환을 서두르게 만들고 있다.

방산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현대로템은 차륜형 장갑차 수출 계약 과정에서 부품 국적을 낱낱이 검증받았으며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글로벌 군수 고객사를 위해 ‘부품 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 유럽 ESG 실사···더 높은 문턱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이어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을 도입했다. 이는 기업이 협력업체의 인권, 환경, 지배구조까지 감시하고 개선 책임을 지라는 규제다. 예컨대 조선업체가 선박에 쓰는 강재, 화학업체가 사용하는 원료의 전 과정에 ESG 리스크가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정유업은 더 곤란하다. 사우디·이라크산 원유가 주요 원천인데, 중동 정유 과정에서의 탄소·환경 리스크가 고스란히 한국 기업 책임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는 “단순한 품질 인증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 ESG 인증’이 돼버렸다”며 부담을 호소한다.

최근 고려아연은 상반기 OECD 가이드라인에 맞춘 현장 실사를 실시하며 ‘책임광물 관리 체계’를 강화했다. 강제노동·아동노동·반군세력 지원 여부까지 검증해 국제 인증기관(LME, LBMA)의 요구에 부합하는 관리 체계를 구축 중이다. 이는 ‘자원의 투명성’을 무기로 삼으려는 전략적 대응이다. 금호석유화학도 협력사 ESG 워크숍을 열고 공급망 전반 관리 체계를 강화했다.

■ 새로운 무역게임···한국의 시험대

그러나 국내 기업 대응은 아직 부족하다. 동반성장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00대 기업 중 공급망 ESG 관리 정책을 보고서에 공시한 기업은 절반(54%)에 그쳤고, 협력사 시정조치 계획을 운영하는 기업은 17%에 불과하다. 중소 협력사는 “전문 인력과 자원이 없어 대응 속도가 늦다”고 토로한다.

국회는 ‘인권환경실사법(가칭)’이 발의됐다. 법안은 직원 500명 이상, 매출 2000억원 이상 기업에 공급망 인권·환경 실사를 의무화한다. 매년 실사 계획을 수립해 이사회 승인까지 거치도록 했고, 위반 시 징역·벌금형도 가능하다. 다만 산업계에서는 “유럽보다 엄격한 국내 규제가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공급망 실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다. 미국은 지정학적 리스크 차단을, 유럽은 ESG와 기후 대응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두 기준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했다. 결국 한국 산업의 생존법은 투명성과 지속가능성을 리스크가 아닌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데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