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무실에서 만난 유상철 HJ중공업 조선 부문 대표(사진=서효림 기자)
1937년 세워져 국내 최초의 강선 건조 조선소인 HJ중공업은 한 때 자본금 대비 자본 총계 비율이 -140%로 완전 자본 잠식에 빠졌었다. 한진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는 과정에서 부침을 겪었던 HJ중공업은 2021년 사명을 변경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31일 찾아간 부산 영도조선소의 거대한 도크 위, 다시 용접 불빛이 살아났다. 유상철 대표이사는 “HJ중공업이 걸어온 길은 곧 한국 조선산업의 축소판”이라며 “이제는 구조조정의 끝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 유상증자 이후 ‘RG 리스크’ 해소… 수주 확대의 발판
HJ중공업은 지난달 201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마치며 부채비율을 상반기 565%에서 356%로 낮췄다. 중대형 조선사 평균(284%)에 근접한 수준이다. 산업은행 등 주요 보증기관으로부터의 RG(선수금환급보증) 한도도 넓어질 전망이다.
유 대표는 “이번 증자는 단순한 재무개선이 아니라 시장 신뢰의 회복”이라며 “RG 한도가 넓어지면 신규 수주와 프로젝트 파이낸싱 모두에서 전략적 여유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조선사에게 RG는 생존의 기준이다. 신용도가 낮으면 선박 계약금 반환 보증이 제한돼 수주 자체가 막히기 때문이다. HJ중공업은 이번 유증으로 그 족쇄를 풀었다.
HJ중공업은 올 들어 에이치라인해운의 1만8000㎥급 LNG 벙커링선, 오세아니아 선주사의 8850TEU급 친환경 컨테이너선 등 고부가 선박을 잇따라 수주했다. 지난해 조선부문 매출은 8245억원으로 전년 대비 14% 늘었고, 영업이익은 291억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수주잔고는 1조9467억원으로 약 3~4년 치 일감을 확보했다.
유 대표는 “HJ중공업은 중형급 조선소 중 유일하게 상선과 특수선을 동시에 설계·건조할 수 있다”며 “이 밸런스가 경기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LNG 벙커링선과 같은 친환경 선박 시장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해 수익 구조를 고도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HJ중공업이 건조한 해군 고속상륙정 LSF-Ⅱ(사진=HJ중공업)
■ 국내 1호 방산 조선소의 경험···美 해군 MRO 협약 임박
HJ중공업은 미 해군 함정 유지·보수(MRO) 시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9월 미 해군 해상체계사령부(NAVSEA)의 실사를 마쳤으며, 이르면 11월 중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할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에 이어 세 번째다.
부산 영도조선소에는 미 해군 규격에 맞춘 전력공급 설비가 새로 구축됐다. 영도는 부산항 중앙에 위치해 해상 접근성이 뛰어나고, 선박 입·출항이 편리해 MRO 거점으로 최적의 입지를 갖췄다는 평가다. 항로의 수심이 깊고 해상·육상 물류 인프라가 인접해 대형 함정 정비에도 지리적 강점이 뚜렷하다.
그는 “HJ중공업이 1974년 국내 1호 방산 조선소로 지정된 이후 축적한 경험이 이번에 다시 빛을 볼 것”이라며 “미 해군과의 협력이 성사되면 한국형 MRO 산업의 새로운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NAVSEA 실사단은 HJ중공업의 기술력과 보안체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 ‘MKSGA’, 한국 조선의 자생력 회복···“생존 아닌 성장 목표”
2019년 회생절차에 들어갔던 필리핀 수빅조선소는 이제 한국-필리핀 협력의 새 기반이 됐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법무부·조선해양플랜트협회의 E-7 비자 확대 정책에 발맞춰 필리핀 용접공 200여 명을 국내 조선사 중 처음으로 대규모 채용했다. 수빅조선소 출신 숙련공들은 숙련도·성실성·현장 적응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HJ중공업의 기술력 복원에 기여하고 있다. 회사는 이들을 모두 직영으로 고용해 숙소·의료·생활 인프라를 지원하며 애사심을 높였다.
한때 워크아웃과 대주주 교체를 거치며 생존의 기로에 섰던 HJ중공업은 올해 유가증권시장 주가 상승률 1위(420.63%)라는 기록을 세웠다. 트럼프 행정부가 ‘MASGA’를 외쳤다면, HJ중공업의 전략은 ‘MKSGA(Make Korean Shipbuilding Great Again)’로 요약된다. 구조조정의 상징에서 성장의 증거로 도약한 HJ중공업의 목표는 이제 살아남는 것이 아닌 더 멀리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