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이 미세화의 종착점에 도달하며 후공정 기술이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무어의 법칙이 더 이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AI 반도체의 폭발적 수요가 고대역폭·고집적·고효율을 동시에 요구하면서 산업의 중심축은 전공정에서 패키징으로 이동했다. 이 전환기의 정점에 ‘하이브리드 본딩’이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 성능 향상의 원동력이었던 선폭 미세화는 2nm(나노미터) 이하 공정에서 물리적·경제적 한계에 부딪혔다. 초미세 공정 도입에 따른 비용 폭증, 단일칩 구조에서의 수율 저하, 기능별 설계 복잡도 증가는 업계가 새로운 대안을 찾도록 압박했다. 이에 칩렛·헤테로 인테그레이션 기반 패키징 기술이 빠르게 확산됐지만, 통신 거리 증가와 전력 효율 저하 등 구조적 제약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 위한 기술로 하이브리드 본딩이 급부상했다. 기존 범프 기반 본딩은 범프 간 간격(pitch)을 좁혀 I/O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진화했지만, 약 20μm(마이크로미터) 이하로 내려가는 순간 쇼트 불량이 급증해 더 이상 축소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반해 하이브리드 본딩은 범프를 아예 제거하고 구리-구리를 직접 접합하는 방식으로, 이론적으로 1μm 이하 pitch 구현까지 가능한 초고밀도 구조를 제공한다. HBM4가 I/O를 2배(2,048개)로 늘리며 선택한 해법이 바로 이 기술이다.


적층 단수 증가로 인한 높이 문제도 하이브리드 본딩이 해결할 수 있는 핵심 과제다. 기존 MR-MUF·TC-NCF 방식은 범프와 언더필 두께 탓에 높이를 낮추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하이브리드 본딩은 언더필을 제거해 스택 두께를 15% 이상 감소시키고 신호 전달 거리까지 단축한다. 더불어 발열 문제에서도 기존 대비 열저항을 최대 47% 감소시키는 등 고적층 HBM·HBF 구조의 취약점을 보완한다. AI 반도체 성능 병목 중 하나였던 전력 밀도와 열 축적 문제를 구조적으로 줄이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도는 더욱 크다.

다만 하이브리드 본딩은 ‘전공정 수준의 후공정’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까다로운 공정 환경을 요구한다. 구리-구리 접합은 미세한 먼지 하나만 있어도 접합이 실패할 수 있어 기존 후공정의 Class 1,000~10,000 청정도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이에 Class 1~10 수준의 초고청정 환경이 필수로 요구되며 CMP·플라즈마 활성화·고난도 어닐링·나노미터 계측 등 전공정 기술이 대거 후공정 단계에 편입된다. 결국 초기 시장은 전공정 경험이 풍부한 업체가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별 경쟁 구도도 뚜렷하다. HPSP는 고압수소어닐링 분야에서 독보적 신뢰성과 레퍼런스를 확보해 하이브리드 본딩 확산 시 필수 공정 장비 기업으로 꼽힌다. 한미반도체는 Advanced MR-MUF 기술을 기반으로 HBM 시장을 선도해 왔으며, 자체 하이브리드 본더 기술 설계를 통해 차세대 패키징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 중이다. SK하이닉스는 HBM3 12단 하이브리드 본딩 패키지 테스트에 성공하며 기술 내재화를 가속하고 있다. HBM 수요 급증과 대규모 투자 여력을 바탕으로 하이브리드 본딩 기반 HBM 라인 확장을 노리는 모습이다.


AI 시대의 핵심인 고대역폭·고집적 패키징 요구는 앞으로 더 빠르고 더 강력해질 전망이다. 범프 기반 본딩이 이미 물리적 한계에 도달한 만큼 하이브리드 본딩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 기술로 자리 잡고 있다. 전공정과 후공정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술 전환기 속에서 누가 안정적인 품질과 수율을 확보하느냐가 향후 반도체 경쟁력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AI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가를 새로운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 필자인 한용희 그로쓰리서치 연구원은 투자자산운용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SBS Biz 방송에 출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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