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2012년 발표한 '대기업집단 주식소유현황 및 지분도 분석 공개' 자료 중 일부. 왼쪽 삼성그룹의 경우 순환출자를 해소하지 못해 지분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 지분도를 따라 그리려 했다가 실패한 기자들이 많다. 반면, 오른쪽 SK그룹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지분관계를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도 복잡하긴 하지만.(자료=공정위)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잊으려 합니다. 그래야 삶을 지속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기억도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도 그런 기억 중 하나입니다.
외환위기의 다른 이름, ‘IMF 구제금융 사태’는 도대체 왜 일어난 걸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무모한 정부와 재벌의 탐욕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30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자부심으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박정희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임기 중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선언합니다. 이를 위해 ‘신경제 100일 계획’을 발표하며 금융 및 투자 규제를 대폭 완화합니다.
‘먼저 빌리는 놈이 임자’인 시대가 되자 ‘세계경영’을 표방한 대우그룹 등 재벌들은 너도나도 은행 돈으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습니다. 은행 역시 대마불사를 믿고 재벌에 쉽게 돈을 빌려줬습니다. 대출 경쟁이 격화하면서 은행들은 해외에서 큰돈을 빌려오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경제관료들은 대통령의 GDP 1만불 공약을 위해 원화의 평가절하를 인위적으로 막습니다. 이는 곧 기업의 수출경쟁력 약화로 이어졌고,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외화 감소)로 돌아옵니다. 그럼에도 재벌의 과잉·중복투자는 지속됐고, 결국 은행의 부실까지 초래합니다.
‘내란극복 정부’라는 자부심으로 2025년 이재명 대통령의 자신감도 하늘을 찌릅니다. ‘윤석열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AI 3대 강국, 코스피 5000’ 시대를 선언합니다. 이를 위해 ‘150조원 국민성장펀드’를 발표하며 금융 및 투자 규제 대폭 완화를 추진하려 합니다. 30년 전 김영삼 정부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혹자는 “30년 전과 달리 금산분리 규제가 잘 작동 중인데 지주회사에 CVC 좀 허용해 준다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지주회사 제도의 의미와 역할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1999년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지주회사는 전면 금지된 제도였습니다. 적은 자본으로 여러 회사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어 경제력 집중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환위기 전후의 국내 대기업들도 굳이 지주회사를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조차 ‘오늘은 기필코 성공하겠다’며 큰 종이를 펼쳐 놓고 계열사 지분 관계를 하나씩 그리다 중도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외환위기가 터졌죠.
경제 주권을 잃은 IMF 체제에서 김대중 정부는 순환출자 해소 방안을 찾기 위해 몰두하다 지주회사 체제에 주목합니다. 복잡한 지분 관계를 파악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데 있어 거미줄(순환출자)보다는 피라미드(지주회사)가 그나마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대신 나쁜 상황을 나쁜 제도로 막는 것이었으므로 보완과 변형, 즉 안전장치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적 현실을 감안해 여러 자회사, 손자회사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하되, 무한 확장을 막기 위해 지분율 규제를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환위기를 교훈 삼아 금산분리를 엄격히 적용해 금융과 산업의 동반 부실을 막는다는 대원칙을 세웠습니다.
요약하면 대한민국에서 지주회사 제도는 경제력 집중을 막는 대안이어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순환출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뾰족한 수가 없어 과도기적 차선책으로 도입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순환출자를 해소하지 못한 기업집단에 엄격한 페널티를 적용하면서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한 것이죠. 세월이 흘러 지주회사 전환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세대교체가 일어나면 상속세 등이 작동돼 적은 지분으로 수십, 수백 개의 회사를 동시 지배하는 재벌의 황제경영도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란 기대도 있었습니다.(하지만 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죠. 이재용 회장의 삼성그룹을 위시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대물림하려 각종 편법, 불법이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LG그룹 등은 자사주의 마법을 동원해 지주회사제도를 오히려 지배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는 꼼수를 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분율 규제와 금산분리 원칙이 없는 지주회사 체제는 복잡한 순환출자보다 나을 게 별로 없는, 재벌의 무한 확장을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재계가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 시스템이죠. 재계의 본심은 외환위기 이전의 ‘순환출자 시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안전장치 없는 지주회사’ 목표라도 달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궁극의 목적이자 가치인 ‘부의 확장과 대물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경제 양극화라는 원죄로 돌파가 쉽지 않습니다. 평상시 투자 활성화, 기업경쟁력 강화, 중소기업 동반성장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다 적절한 기회를 포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첫 번째 기회는 2020년 우연히,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였습니다. 재난 발생 직전인 2018년, 경제부총리 출신의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재벌의 사내유보금 활성화’ 이슈를 띄우며 CVC 규제 완화를 추진했습니다. 앞서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사내유보금 활성화를 위해 ‘징벌적 과세’를 추진했는데, 정권이 바뀌니 정반대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하지만 학계와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위에 그쳤고, 대신 벤처지주회사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뜻을 모읍니다. 재계가 규제완화의 이유로 내세운 벤처 활성화와 동반성장은 기존의 제도와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실행이 가능한 반면, 금산분리 훼손은 댐에 구멍이 뚫리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파장을 가늠하기 어려운 ‘판도라의 상자’였기 때문입니다. ‘벤처기업 육성조차 대기업 손에 맡기는 것이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공정경제냐’는 비판도 흘려듣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듬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터졌습니다. 대형 위기를 극복하려면 평시 보통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고 전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재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단의 규제 완화를 요구합니다. 여당은 이에 적극 부응해 김병욱·이원욱 의원 등을 중심으로 재계의 오랜 바람을 풀어주는 데 앞장섭니다. 하지만 부작용을 우려한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안전장치’를 채운 채 관련법이 통과됩니다. 재계는 아쉬웠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고, 일단 구멍이 뚫린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은 지난 2회 기사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올해, 2025년 찾아왔습니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미국발 관세전쟁이라는 코로나19 위기와 버금가는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잠재성장률 하락 추세를 막고 ‘AI 3대강국’으로 도약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을 필두로 재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단의 규제 완화를 요구합니다. 정부와 여당은 이에 적극 부응해 재계의 오랜 바람을 풀어주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5년 전과 달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재계는 이 절호의 기회를 발판 삼아 5년 전 뚫었던 금산분리라는 공고한 댐의 구멍을 더 크게 넓히려 온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먼저 빌리는 놈이 임자’인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대기업의 과잉·중복투자도, 은행의 부실도 아직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의 다른 이름은 산업과 금융의 밀착, 즉 ‘금산밀월’, ‘금산유착’입니다. 여기에 금산분리 규제까지 유명무실화되면 ‘금산밀월’은 은행의 치열한 기업고객 확보 경쟁을 거치며 금융과 산업이 하나되는 ‘금산합체’, ‘금산동체’로 나아갈 공산이 큽니다. 이는 재계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땅에서 30년 전 YS 시대에 맛봤던 ‘엘도라도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돈도 권력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경제 양극화가 심화하는 와중에 제2의 IMF 사태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다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주회사에 CVC 좀 허용해 준다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생산적 금융’을 빼놓고 이재명 정부의 금융정책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잠재성장률 반등을 위해서는 AI 등 미래전략산업 육성이 필요하고, 미래전략산업을 육성하려면 ‘생산적 금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생산적 금융’을 위해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한지 가급적 편견 없이 몇몇 쟁점을 도마 위에 올려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