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한 제철 공장에 쌓여있는 철근들 (사진=연합뉴스)
정부가 ‘철강산업 구조조정 및 고도화 방향’을 발표하며 산업 재편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업계의 반응은 기대보다 싸늘하다. 감산 유도, 전기요금 완충, 내수 중소제강사 지원 등 현장 체감형 대책이 빠져 있어 구조적 개선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회의론이 높다.
이 공백을 메울 수단으로 주목받는 것이 여야가 이달 처리에 공감대를 이룬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 특별법)’이다. 단기 처방의 한계를 보완할 마지막 카드로 평가된다.
■ 정부 지원책, 현장에선 ‘그림 속 떡’…기대 모으는 K-스틸법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철강산업 구조조정 및 고도화 방향’을 내놓고 ▲설비 효율화 ▲탄소저감 기술 고도화 ▲글로벌 공급망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중장기 로드맵을 발표했다. 5700억 원 규모의 금융지원 패키지와 2000억 원대의 연구개발 자금 투입도 예고됐다. 그러나 세부 지원책은 대기업 중심의 수출 촉진과 인증, 물류비 보조에 집중되어 있다. 내수 기반 중소 제강사와 전기로 업체들에겐 체감 효과가 미미하다
정부안은 ‘범용재 감산’이라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인 감산 유인책이 빠진 점도 문제로 꼽힌다. 포스코·현대제철·동국제강 등 주요 제철소의 고로·전기로 가동률이 여전히 80~90%를 유지하고 있어 시장 자율에만 의존하는 구조조정으로는 공급 과잉 해소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한계에서 기대를 모으는 법적 기반이 바로 ‘K-스틸법’이다. 산업부는 내년 상반기 법안 발의를 목표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지원 체계와 친환경 설비 전환 인센티브 제도를 신설할 방침이다.
■ K-스틸법, 산업 리셋 위한 제도적 틀
K-스틸법의 핵심은 산업 구조조정, 녹색 전환, 산업 생태계 복원 세 축으로 요약된다. 우선 과잉 공급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비조정 시스템이 도입된다. 정부가 업계 협의체를 운영해 감산 계획을 조율하고 참여 기업에는 금융·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또한 고로 중심 생산체계를 전기로·수소환원제철 등 친환경 공정으로 전환하도록 지원하고 RE100과 탄소감축 인증제도와 연계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아울러 중소 제강사와 후방 소재 기업을 대상으로 정책금융 한도 확대와 지역 철강산단 재편도 병행한다. 낙후된 설비와 인력을 신산업 중심으로 재배치해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구상이다.
■ “시장개입 vs 산업보호” 두고 입법 지연…내년 하반기 시행 가능
업계는 K-스틸법을 통해 원산지 규정 강화와 불공정 철강재 유통 차단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철강업계 제소로 반덤핑 관세가 부과되자 일부 중국산 제품이 HS코드를 속여 수입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정부가 단속에 나섰지만 법적 근거가 미비해 실효성은 떨어졌다. 원산지 규정이 강화되면 저가 중국산 철강의 유입이 줄어 철강 가격의 전반적 상승과 국내 시장 안정 효과가 기대된다.
K-스틸법 논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2년 산업부가 ‘국가 기간산업 특별법’ 형태로 초안을 검토했지만 당시 여야가 조선·철강·석유화학 중 어느 산업을 우선 지원할지를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며 무산됐다.
올해 상반기에도 법안 필요성에는 여야가 공감했으나 여당은 “보호산업 지정은 시장 개입”이라며 신중론을, 야당은 “탄소중립 시대의 기반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며 적극론을 폈다. 정치권 이견에 더해 산업부 내부에서도 반도체·이차전지특별법 등 신산업 중심의 입법이 우선되며 ‘전통 제조업 지원법’인 K-스틸법은 후순위로 밀렸다.
그 사이 정부는 제4기 탄소배출권 정책을 추진하며 ‘법안과 행정의 엇박자’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산업계는 “녹색 전환의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정책 간 조화와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 산업 리셋의 출발점… 감산·탈탄소·수익구조 전환 삼각축 맞물려야
다행히 여야가 이달 중 법안 처리를 공식화하며 통과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 어기구·권향엽 의원, 국민의힘 이상휘·김정재 의원 등은 ‘K-스틸법’을 11월 중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뜻을 모았다. 법이 통과되면 6개월 후 시행될 예정이어서 빠르면 내년 5~6월부터 본격 적용된다. 업계는 내년 하반기부터 정책 효과가 가시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K-스틸법은 단순한 지원법이 아니라 산업의 ‘리셋(Reset)’을 위한 거버넌스 전환의 출발점이다. 정부 지원이 설비투자 중심에서 에너지·수익구조 중심으로 바뀌고 업계의 감산 노력이 탈탄소 전략과 맞물릴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