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장자 승계 원칙이 불문율로 통하던 건설업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단행된 2026년 정기 임원 인사에서 실무 능력을 갖춘 차남이 그룹의 핵심 전략 부서장으로 등판하거나 지배구조를 재편하고 있는 모습이다.
■ HDC, 차남 1년 만에 임원 고속 승진…장남보다 경영수업 진도 먼저
HDC 삼성동 본사 사옥 (사진=HDC)
3일 HDC그룹과 업계에 따르면 HDC그룹은 지난달 26일 단행한 2026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정몽규 회장의 차남 정원선(31) 상무보를 HDC현대산업개발 DXT(Digital Transformation)실장으로 임명했다.
업계의 관심은 이번 인사가 HDC의 승계 구도에 미칠 영향이다. 현재 정몽규 회장의 세 아들 지분율을 살펴보면 장남 정준선 씨가 0.49%로 가장 많고, 차남 정원선 상무보가 0.28%, 삼남 정운선 씨가 0.22%를 보유하고 있다.
지분 구조상으로는 장자 승계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당장의 경영 참여도는 차남이 먼저 나서고 있다. 장남 정준선 씨는 KAIST 교수로서 학계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차남 정 상무보는 오너 일가 중 유일하게 그룹에 적을 두고 실무를 챙기고 있기 때문.
지난해 12월 회계팀 부장으로 입사해 1년 만에 임원이 된 정 상무보는 CEO 직속 조직인 DXT실을 이끌며 그룹의 미래 먹거리 발굴을 총괄하게 된다. 장남이 경영 일선과 거리를 둔 사이 차남이 실질적인 오너 경영인으로서 경영 수업의 진도를 가장 먼저 나가고 있는 셈이다.
HDC그룹 측은 "이번 인사에 대해 지속 가능한 성장 체계 구축에 초점을 맞춰 젊은 리더 및 기술 인재를 발탁한 것"이라고 공식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인사에서 40대 이하 임원 수가 기존 6명에서 12명으로 2배 늘어났으며, 차남의 승진도 이러한 세대교체와 미래 혁신 기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해석이다.
■ 호반, 차남 부사장 승진·지주사 전환… 3남매 독립 경영 토대 마련
호반그룹은 장남과 차남, 장녀가 각자의 전문 영역을 맡아 시너지를 내는 '형제 경영' 체제를 확고히 하고 있다.
김상열 창업주의 3남매는 장남 김대헌 사장이 주택·건설(호반건설), 차남 김민성 부사장이 제조·전선(호반산업), 장녀 김윤혜 사장이 부동산·리조트(호반프라퍼티)를 각각 맡는 역할 분담을 확고히 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30일 인사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차남 김민성 부사장은 그룹의 중장기 전략 수립을 주도하게 된다. 호반그룹 관계자는 차남의 승진 배경에 대해 "그룹의 핵심 전략 사업을 강하게 추진하고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호반그룹 김대헌 사장(왼쪽부터) 차남 김민성 부사장, 김윤혜 사장 (사진=호반그룹)
이와 함께 최근 호반산업은 지주사 전환에도 나서고 있다. 다만 지주사 전환 작업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당초 호반산업은 공시를 통해 오는 10월 'HB호반지주(가칭)' 출범을 알렸으나, 현재는 내부 검토를 이유로 관련 절차를 잠정 보류한 상태다.
그룹 측은 "대한전선의 가치 상승으로 자회사 지분 비율이 50%를 초과해 공정거래법상 지주사 전환 요건에 해당한다"고 밝혔으나, 실제 전환 시기나 방식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지주사 출범이 다소 미뤄졌을 뿐, 차남이 이끄는 제조 부문의 독립성 강화라는 방향성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법적 요건 해소와 함께 차남 중심의 지배구조 개편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수순으로 분석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HDC는 AI와 데이터 등 기술 혁신을 주도할 리더십이, 호반은 방대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구조적 안정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각 그룹이 처한 상황에 맞춰 오너 2, 3세들의 역할을 재조정하며 승계의 해법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