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건설부문이 한남4구역 1조5000억원 규모의 도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31일 밝혔다. 시공사 선정 6개월 만이다. '래미안 글로우힐즈 한남' 단지 중심에 조성되는 4000평 규모의 센트럴 커뮤니티 조감도. (사진=삼성물산)
2025년 1월18일, 서울 용산구 한남4구역 재개발 시공사 선정 총회장. 삼성물산이 경쟁사를 제치고 시공권을 확보하는 순간, 장내에는 단지명 '래미안 그로우힐즈 한남'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는 서울 정비사업의 '브랜드 쏠림' 현상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반면 같은 시기 지방 광역시의 정비사업 현장 곳곳에서는 조합원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공사비를 상향 조정했음에도 1군 건설사들이 입찰을 포기해 무응찰 사태가 속출했기 때문.
2025년 건설 시장은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로도 부족한 초양극화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랜드와 기술력의 격차가 어떻게 건설사의 생존 지도를 다시 그렸는지 되돌아봤다.
■ 삼성·현대… 서울 요지 나눠 가진 '하이엔드 양강'
2025년 정비사업 시장의 키워드는 '서울 쏠림'이었다. 돈이 되는 서울 핵심지(강남·용산·여의도)에는 자금력과 브랜드 파워를 갖춘 메이저 건설사들이 깃발을 꽂았다. 하지만 그 외 지역은 외면받았다.
올해는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의 양강 구도가 뚜렷했다. 삼성물산은 1월 한남4구역에 이어 11월 여의도 대교아파트 재건축을 수주하며 강북과 여의도 핵심지를 장악했다. 현대건설은 이미 지난해 여의도 1호 재건축인 '한양아파트(디에이치 여의도퍼스트)' 시공권을 따낸 데 이어, 올해 본계약 절차를 밟으며 압구정 등 한강변 하이엔드 벨트를 굳히고 있다.
현대건설 제안 압구정2구역 투시도. (사진=현대건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기 침체기에는 소비자들이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시공 능력이 검증된 최상위 건설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며 "조합원들이 분담금을 더 내더라도 확실한 브랜드 가치를 보장받으려는 심리가 수주 시장의 양극화를 불렀다"고 분석했다.
■ "더 조용하게, 더 깨끗하게" 기술로 생존 경쟁
브랜드 이름값만으로 승부하던 시대도 지났다. 정부의 층간소음 사후 확인제 강화 기조에 발맞춰 대형 건설사들은 '층간소음'과 '친환경'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주요 대형사들은 바닥 슬래브 두께를 기존(210mm)보다 두꺼운 250mm 이상으로 설계하고, 고성능 완충재를 적용해 '층간소음 1등급' 성능 확보에 주력했다. 현대건설은 자체 연구시설인 'H 사일런트 랩'을 통해 검증된 1등급 바닥 시스템과 층간소음 저감 기술을 수주전의 핵심 무기로 내세웠다.
DL이앤씨도 독자 개발한 층간소음 저감 기술인 '디사일런트(D-Silent) 바닥구조'가 1등급 성능을 인정받은 점을 강조하며 고급 주택 수요를 공략했다. 롯데건설은 하이엔드 브랜드 '르엘(LE-EL)' 사업장에 고효율 에너지 시스템과 미세먼지 저감 기술을 제안하며 차별화에 나섰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이제 층간소음 1등급 성적서와 제로에너지 빌딩(ZEB) 솔루션은 입찰을 위한 기본이나 다름없다"며 "기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건설사는 입찰 설명회에서 경쟁력을 잃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DL이앤씨가 개발한 ‘D-사일런스 서비스(D-Silence Service)’의 알람이 울리는 모습. (사진=DL이앤씨)
■ "사고 난 기업은 불안"… 깐깐해진 '안전 검증'
연이은 중대재해와 부실시공 이슈는 수주 시장의 진입 장벽을 높였다. 최근 2~3년 내 사망 사고나 붕괴 사고 이력이 있는 건설사들에 대해 조합들이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
실제로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중대재해 다발 건설사에 대한 제재 필요성이 제기됐다. 서울 목동과 강남권 등 일부 정비사업장에서는 입찰 지침 검토 단계에서 '최근 2년간 영업정지나 중대재해 발생 이력이 있는 업체에 대한 감점'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또한 GS건설, 현대건설 등 주요 대형사들은 서울시의 정책 기조에 맞춰 '공사 전 과정 동영상 기록'을 적극 수용하고 이를 조합원들에게 안전 시공의 근거로 제시하며 신뢰 회복에 안간힘을 쓰는 분위기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은 "브랜드 평판이 훼손된 기업은 수주 시장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건설사들의 안전 마케팅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며 수요자들이 시공 품질과 안전 이슈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분석하고 있다.
■ "지방은 1군 무덤"… 부산·울산의 비명
서울이 '하이엔드 전쟁'으로 뜨거울 때 지방은 차갑게 식어갔다. 지방 광역시의 재개발·재건축 현장은 공사비를 올려줘도 시공사를 찾지 못하거나 기존 시공사와의 갈등으로 사업이 멈춰 서는 사례가 빈번했다.
부산의 대어급 사업지인 부산진구 시민공원 인근 촉진 2-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에서는 시공사 GS건설이 제시한 3.3㎡당 900만원대, 최대 987만원의 공사비를 두고 조합이 800만원대 수준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다가 2023년 임시총회에서 결국 GS건설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이처럼 공사비를 둘러싼 충돌과 분담금 부담 우려는 올해에도 지방 정비사업 추진의 핵심 걸림돌로 남아 있다.
울산 중구 B-04(북정·교동) 재개발도 기존 시공사였던 롯데건설·GS건설 컨소시엄과의 계약을 해지한 뒤, 두 차례 시공사 선정 입찰이 무응찰로 유찰되는 등 난항을 겪었다. 조합은 결국 수의계약으로 삼성물산·현대건설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했지만, 급등한 공사비와 미분양 리스크에 대한 부담이 여전히 사업 정상화의 최대 변수로 지목되고 있다.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수도권 지방 양극화 현상 관련 "서울 핵심지는 하이엔드 브랜드 아파트로 변모하며 가치가 상승하는 반면, 지방은 노후화된 도심이 방치되며 슬럼화될 위기에 처했다"며 "수도권과 지방의 부동산 시장 초양극화가 고착화되면서 향후 국토 균형 발전 차원에서도 우려가 된다"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