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K2 전차와 K9 자주곡사포 도착 당시 폴란드 군인들 (사진=AFP연합뉴스)

미국의 ‘방위비 청구서’가 유럽을 흔들고 있다. GDP의 5%라는 새로운 국방비 규범이 현실화되며 무기 수요가 전례 없는 규모로 폭증하고 있다. 가장 먼저 수혜를 입은 쪽은 미국 방산업계다. 하지만 이 거대한 방산시장 개편의 여파는 곧 전 세계를 향하고 있다. 한국 역시 ‘국방=산업’이라는 새로운 방정식 앞에서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나토(NATO) 회원국 전체의 국방예산 총합은 2023년 기준 약 1조3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 중 유럽 31개국이 집행하는 예산만 5천억 달러 수준이며, 대부분이 무기 도입과 장비 교체에 쓰인다.

전차부터 드론까지…지정학이 만든 ‘실물경제 수요’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평화는 오지 않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각국은 신속하게 재래식 전력을 보강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가장 즉각적인 수혜를 입은 건 미국 방산업체다. 2023년 한 해 동안 미국의 대외군사판매(FMS) 승인액은 800억 달러를 넘겨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록히드마틴, RTX(구 레이시온), 제너럴다이내믹스 등 미국 방산 빅3는 글로벌 주가 상승과 함께 생산라인 증설에 착수했다.

방위비 증액은 단순한 예산 확대를 넘어선다. 실제로 유럽 각국은 전차, 자주포, 전투기, 미사일, 드론, 탄약 등 전방위 무기체계에 걸쳐 실물 수요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전차 분야에서는 독일과 폴란드를 중심으로 미국산 M1A2, 한국산 K2 흑표 전차 도입이 확대되고 있으며, 자주포 부문 역시 한국의 K9과 프랑스의 Caesar 등 현대식 자주포가 유럽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하이마스에서 발사되는 미국 차세대 중거리 프리즘(PrSM) 미사일 (사진=미국 국방부)

미사일은 방공과 공세 전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미국의 패트리엇(PAC-3), 하이마스(HIMARS), NASAMS 등 주요 시스템 도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전투기 부문에서는 F-35의 수요가 핀란드, 체코, 독일 등에서 급증하고 있으며, 유럽이 독자 개발 중인 차세대 전투기 프로젝트(FCAS, 템페스트)는 기술적 지연으로 당분간 실전 배치가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탄약 수요도 급격히 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포탄 부족 사태를 겪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과 미국 등 외부 공급처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는 3년 내 탄약 생산량을 5배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국영 방산기업인 PGZ에 약 9000억 원을 투입하는 등 자급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美가 연 ‘무기 시장’···유럽도 한국도 뛰어든다

EU는 자체 재무장 계획을 세우고 공동채권 발행, 국방비 규정 예외 등 다양한 조치에 나서고 있다. 2035년까지 무기 공동구매의 65%를 역내에서 조달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러나 생산설비 확충과 기술 내재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미국, 중기적으로는 한국 등 ‘빠른 납기·검증된 무기’를 갖춘 국가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등은 유럽 현지 생산 거점을 구축하며 ‘속도전’에 대응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K9 자주포, K2 전차, FA-50 등에서 ‘신속 납기’와 ‘검증된 성능’으로 유럽 시장에서 이름을 알렸다. 방산은 무기를 넘어 산업이자 전략이 됐다. 지금의 전략은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한국 방산 산업의 성장을 결정짓는 분기점이다.